시코쿠 4박 5일
다카마쓰의 아침, 예약해 둔 렌터카의 운전석에 올랐다. 우핸들 차량에 앉아 방향지시등을 켠다는 것이 그만 와이퍼를 건드리고 말았다. 맑은 창유리를 뽀득거리며 닦아내는 와이퍼를 보며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익숙했던 내 삶의 운전대마저 완전히 반대로 뒤집힌 기분. 낯선 감각에 천천히 몸을 맡기며 고토히라(琴平)를 향해 가속 페달을 밟았다.
첫 목적지는 고토히라궁. 입구의 상점에서 빌려주는 단단한 나무 지팡이 하나에 의지해 끝이 보이지 않는 돌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본궁까지 785단, 내친김에 맨 위쪽의 오쿠샤(奥社)까지 1,368단의 계단을 묵묵히 올랐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허벅지가 뻐근해질 무렵, 본궁 앞에서 엄숙하게 치러지는 전통 결혼식 장면과 우연히 마주쳤다. 수백 년 된 낡은 신사, 그리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남녀. 가파른 계단을 딛고 올라온 수고로움이 묘한 평안함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산을 내려와 향한 곳은 사누키 우동의 본고장답게 우동을 직접 만들어보는 체험장이었다. 흥겨운 음악에 맞춰 밀가루 반죽을 발로 밟고, 직접 썰어낸 면을 끓여 먹는 과정. 오랫동안 최고급 일본 식자재를 발굴해 한국에 수입하고 유통하는 기업을 이끌어온 상인(商人)의 눈에, 이것은 단순한 요리 체험이 아니었다. 밀가루와 물, 소금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식자재가 '스토리'와 '체험'을 입고 전 세계인이 지갑을 여는 훌륭한 문화 콘텐츠로 둔갑하는 현장. 로컬 비즈니스의 무서운 저력이 그 쫄깃한 면발 속에 스며 있었다.
오후에는 차머리를 도쿠시마현의 깊은 산골로 돌렸다. 굽이진 도로를 아슬아슬하게 통과해 마주한 오보케(大步危) 협곡. 1억 5천만 년 전 바닷속 땅이 융기해 만들어졌다는 거대한 기암괴석 사이로 에메랄드빛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협곡에서 차로 15분 남짓 더 들어가면, 깎아지른 절벽 사이를 나무 덩굴로 아슬아슬하게 엮어놓은 카즈라바시(かずら橋)가 나타난다. 발아래로 시퍼런 계곡물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흔들다리 중간에 서자, 등줄기로 서늘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느덧 산골의 짧은 해가 저물고, 어둠을 뚫고 달려 고치(高知)현에 닿았다. 밤에도 붉은 조명을 받아 빛나는 하리마야 다리를 지나 도심의 쇼핑가로 접어들었다. 늦은 밤 목적지는 고치의 명물, 가쓰오타다키(가다랑어 볏짚 구이)를 내는 식당이었다. 1시간의 고단한 기다림 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주방에서 화염을 뿜어내는 짚불을 바라보았다.
볏짚 특유의 강렬한 불향을 머금은 가다랑어 한 점, 그리고 차가운 생맥주 한 잔. 카가와현에서 시작해 도쿠시마의 험준한 산맥을 넘어 고치현까지, 쉴 새 없이 운전대를 잡았던 하루의 피로가 짙은 불향과 함께 입안에서 녹아내리고 있었다.
[턱시도의 여행수첩 : 도쿠시마현 이야(祖谷) 협곡과 가즈라바시]
오보케 협곡 안쪽에 자리한 '이야(祖谷)' 지역은 일본의 3대 비경(秘境) 중 하나로 꼽히는 깊은 오지입니다. 이곳에 덩굴로 엮은 아슬아슬한 다리 '가즈라바시'가 만들어진 데에는 슬픈 역사가 숨어 있습니다. 12세기 말, 겐지(源氏) 가문과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헤이케(平家) 가문의 무사들이 이 깊은 산골로 숨어들어 왔고, 적이 추격해 오면 언제든 칼로 덩굴을 끊어버리고 도망치기 위해 이런 형태의 다리를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아름다운 자연풍경 이면에는 권력에서 밀려난 자들의 치열하고도 처절한 생존의 흔적이 덩굴처럼 얽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