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비 내리는 고치, 3천 년의 도고 온천

시코쿠 4박 5일

by 턱시도 Tuxedo

고치(高知)에서의 아침, 창밖으로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당초 계획했던 사카모토 료마 기념관과 가쓰라하마 해변 일정은 미련 없이 접어두기로 했다. 빡빡한 일정표에 얽매이지 않고 날씨와 기분에 따라 언제든 방향을 틀 수 있는 것. 정해진 선로를 벗어나 나만의 운전대를 잡은 렌터카 여행자만이 누릴 수 있는 온전한 특권이다.

발길을 돌려 향한 곳은 고치 시내의 명물, 일요 시장이었다.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거리에는 농산물과 과일이 활기차게 펼쳐져 있었다. '무농약'을 자랑스레 내건 상인에게서 산 귤 한 봉지는 생각 이상으로 달고 진했다. 시장의 투박한 온기를 뒤로하고 빗속을 걸어 고치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 입구에는 하급 무사에서 시작해 고치번의 성주까지 오른 야마우치 가즈토요, 그리고 자신의 혼수금으로 명마를 사주어 남편의 출세를 도운 부인 치요의 동상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훗날 시즈오카의 가케가와성에서도 마주하게 될 이 부부의 궤적을 빗속에서 가만히 올려다보며, 치열했던 50대의 내 곁을 묵묵히 지켜주었던 고마운 얼굴을 잠시 떠올렸다.

성을 둘러본 후, 예약해 둔 향토 요리 전문점에 앉았다. 상에 오른 것은 고등어(사바)와 전갱이(아지)의 모양을 통째로 살려낸 파격적인 생김새의 초밥이었다. 멈칫했던 것도 잠시,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비린내 없이 고소한 감칠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하이엔드 일본 식자재를 수입하고 유통하는 상인의 예리한 미각이 번뜩이는 순간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요리의 향연 앞에 결국 소화제 한 병을 털어 넣고 다시 젓가락을 드는 50대 비즈니스맨의 지치지 않는 식욕. 지금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오지만, 그땐 그마저도 여행이 주는 전투적인 즐거움이었다.

해 지기 전 에히메(愛媛)현으로 넘어가기 위해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빗길을 뚫고 무려 160km를 내달리는 만만치 않은 여정 끝에, 마침내 도고(道後) 온천에 닿았다. 비에 젖고 렌터카 운전으로 굳어진 몸을 3,000년 역사를 품은 낡은 온천물에 조용히 뉘었다.

개운해진 몸을 이끌고 마쓰야마 시내의 오카이도 쇼핑가로 향했다. 저녁 메뉴는 마쓰야마의 명물, 도미밥(다이메시)이었다. 부드러운 도미살을 특제 소스에 담가 찰진 밥과 함께 입에 넣고, 시코쿠의 명주 '이시즈치(石鎚)' 그린라벨을 곁들였다. 무려 1.8리터짜리 잇쇼빈(一升瓶)을 시켜놓고 홀로 잔을 기울이던 밤. 비 내리는 고치의 시장통에서 시작해 3,000년 역사의 온천장으로 이어진 길고 짙었던 하루가 향긋한 사케 향 속으로 깊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턱시도의 여행수첩 : 도고 온천과 나쓰메 소세키] 에히메현 마쓰야마시에 위치한 도고 온천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 중 하나로, 3,000년의 역사를 자랑합니다. 특히 일본 근대 문학의 거장 나쓰메 소세키의 명작 소설 『도련님(坊っちゃん)』의 주요 무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소세키가 실제로 마쓰야마의 중학교 교사로 부임했을 때 이 온천을 즐겨 찾았고, 그 경험이 소설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온천장 앞에는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나타나는 '가라쿠리 시계탑'이 있어 매시 정각과 30분마다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단순한 온천 휴양지를 넘어, 문학과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귀중한 공간입니다.



4. 치요 동상.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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