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0년 전의 운전대를 다시 잡다: 시코쿠

시코쿠 4박 5일

by 턱시도 Tuxedo

​기억은 종종 시간의 지층 아래로 가라앉지만, 어떤 풍경은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하게 떠오른다.

​서랍 속에 고이 간직해 두었던 2016년 12월 초입의 기록을 다시 꺼내어 본다. 예순을 넘겨 일본언어문화학을 탐구하는 지금과 달리, 10년 전의 나는 IT 비즈니스의 한가운데서 숨 가쁘게 달리던 50대의 치열한 상인(商人)이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았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나는 시코쿠(四国)를 향해 렌터카의 시동을 걸었다. 4박 5일, 총 이동 거리 750km. 카가와, 도쿠시마, 고치, 에히메라는 시코쿠의 4개 현을 넘어 히로시마와 오카야마까지 닿았던 길고도 깊은 여정의 시작이었다.

​정해진 철로를 달리는 기차가 아니라 굳이 렌터카의 운전대를 고집했던 이유는, 시코쿠라는 땅이 지닌 묘한 고립감과 신비로움 때문이었다. 일본 열도를 구성하는 4개의 주요 섬 중 가장 작고 외진 곳. 예로부터 88개의 사찰을 도는 순례자(오헨로)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그 구도(求道)의 길을, 나는 자동차의 엔진 소리에 의지해 홀로 누볐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당시 스쳐 지나갔던 파편들이 생생하게 재생된다.

붉은 태양이 내려앉던 나오시마의 고즈넉한 바닷가,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아찔하게 펼쳐지던 오보케 협곡과 이야의 덩굴 다리. 낯선 이방인에게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던 고치현 일요 시장의 투박한 온기, 그리고 수천 년의 시간을 품고 하얀 김을 뿜어내던 도고 온천의 밤공기까지.

​바다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세토 대교와 시마나미 해도를 건널 때면, 섬과 섬을 잇는 인간의 집념이 비즈니스 현장에서 무수한 다리를 놓아야 했던 내 삶의 궤적과 겹쳐져 묘한 카타르시스를 안겨주기도 했다.

​최고 19도의 따뜻한 햇살 아래서 시작해 때로는 차가운 겨울비가 운전석 창문을 때리기도 했던 변화무쌍한 750km의 길. 10년이 흐른 지금, 책상머리에 앉아 학도(學徒)의 시선으로 그날의 운전대를 다시 잡아보려 한다. 이것은 치열했던 비즈니스맨이 시코쿠의 굽이진 국도 위에서 발견한 낡고도 찬란한 시간의 기록이다.


​[턱시도의 여행수첩 : 시코쿠(四国)와 세토 내해]

일본을 구성하는 4개의 주요 섬(혼슈, 홋카이도, 규슈, 시코쿠) 중 가장 작은 섬입니다. 이름 그대로 4개의 영지(카가와, 도쿠시마, 고치, 에히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혼슈와 시코쿠 사이에 자리 잡은 바다인 '세토 내해(瀬戸内海)'는 파도가 잔잔하고 수많은 섬이 떠 있어 '일본의 지중해'로 불립니다. 과거에는 배를 타야만 갈 수 있는 고립된 땅이었으나, 현재는 세토 대교를 비롯한 거대한 교량들이 연결되어 자동차로도 바다를 건널 수 있게 되었습니다. 험준한 산세와 고요한 바다를 동시에 품고 있어, 가장 원형에 가까운 일본의 자연과 전통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평가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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