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조선통신사의 바다와 비 젖은 오노미치의 밤

오노미치와 마쓰야마

by 턱시도 Tuxedo

​잔뜩 찌푸린 인천의 하늘을 뒤로하고 날아오른 비행기가 히로시마 공항 활주로에 닿았을 때, 창밖으로는 추적추적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맑은 날을 기대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혼슈에서 바다를 건너 시코쿠로 향하는 긴 여정의 시작을 알리는 비가 그리 밉지만은 않았다. 익숙하게 렌터카 수속을 마치고 홀로 운전대를 잡았다. 와이퍼가 규칙적으로 빗물을 닦아내는 소리를 들으며 남쪽 바다를 향해 가속 페달을 밟았다.
​첫 목적지는 에도 시대의 옛 정취가 고스란히 멈춰 있는 항구마을, 도모노우라(鞆の浦)였다. 좁고 구불구불한 레트로한 골목길을 지나 바닷가에 자리한 후쿠젠지(福禅寺)로 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수백 년 전 조선통신사들이 묵어갔던 객관이 있는 곳이다. 신발을 벗고 다다미방에 앉아 탁 트인 창밖을 바라보았다. 흐린 비구름 아래로 고요한 세토 내해와 '신선도 취할 만큼 아름답다'는 선취도(仙酔島)가 한 폭의 수묵화처럼 떠 있었다. 과거 조선의 통신사 종사관이었던 이방언이 이 풍경을 마주하고 '일본 최고의 경치(日東第一形勝)'라는 현판을 남겼던 그 마음이, 수백 년이 지나 운전대를 잡고 이곳을 찾은 예순 만학도의 가슴에도 고스란히 와닿았다.
​후쿠젠지를 나와 옛 항구의 상징인 상야등(常夜燈) 쪽으로 걸었다. 바다를 오가는 배들의 길잡이가 되어주었던 거대한 돌 등탑이 비를 맞으며 묵묵히 서 있었다. 그 옛날 거센 조류를 기다리며 닻을 내렸을 수많은 상선과 뱃사람들의 숨결이, 비에 젖은 낡은 항구의 돌바닥 위로 아스라이 피어오르는 듯했다.
​날이 어둑해질 무렵, 다시 차를 몰아 오늘 밤을 보낼 오노미치(尾道)에 도착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낯선 도시, 빗물에 반짝이는 골목을 걸어 세토 내해의 해산물을 다루는 향토 요리 식당의 문을 열었다. 따뜻한 사케 한 잔에 신선한 바다의 맛을 곁들인다. 흐린 하늘에서 시작해 조선통신사의 바다를 거쳐 비 젖은 오노미치의 뒷골목으로 이어진 첫날의 여정. 차가운 봄비 속에서 온전히 나만의 속도로 걷고 사색할 수 있었던, 더없이 완벽하고 차분한 여행의 서막이다.


​[턱시도의 여행수첩 : 도모노우라(鞆の浦)와 조선통신사]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시에 위치한 도모노우라는 세토 내해의 정중앙에 자리 잡아, 조류의 방향이 바뀌기를 기다리던 배들이 머물던 '기다림의 항구'였습니다. 파도가 잔잔하고 경치가 빼어나, 에도 시대 일본을 방문했던 조선통신사 일행이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외교와 문화 교류의 무대이기도 합니다. 또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이곳에 머물며 애니메이션 『벼랑 위의 포뇨』를 구상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등대 역할을 했던 상야등과 옛 선착장인 기러기 계단 등 에도 시대 항구의 원형이 일본에서 유일하게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걷는 것만으로도 수백 년 전의 시간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마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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