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수석교사가 되기까지

운이란, 준비가 기회를 만났을 때 생기는 것이다.

by Tech

2015년 8월, 박사학위를 받았다. ‘드디어 끝났구나.’ 학위를 받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막판 논문을 다듬는 과정은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2009년에 박사과정을 시작해 2011년 말, 3년 만에 코스워크를 마쳤지만, 논문 주제를 잡지 못했다. ‘좋은 논문을 쓰고 싶다’, ‘학위 논문이 앞으로의 공부에 토대가 되었으면 좋겠다’, ‘현장 교사에게 도움이 되는 연구면 좋겠다’는 막연한 바람만 있었다. 다행히 ‘수업’이라는 키워드를 놓지 않은 덕분에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끝내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

논문이 끝나고서야 비로소 진로 고민이 시작되었다. 논문을 더 써서 대학에 가볼까, 교육과정평가원 같은 전문 기관에 도전할까, 장학사 시험을 볼까, 아니면 일반 승진으로 교장이 될까.

제일 먼저 제외한 건 일반 승진이었다. 학교장이 되는 것은 부모님께 효도하는 길이었지만, 그동안의 공부가 아까웠다. 박사학위를 마치고 이제 막 홀로서기를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공부와는 결이 다른 승진 점수를 쌓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교육청 장학사도 비슷했다. 장학사 시험을 볼 생각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치열하게 논문을 쓸 이유가 없었다. 설령 운 좋게 합격하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을지는 확신이 없었다. 아마 내 이미지에 맞는 생활지도 업무를 맡게 될 가능성이 컸다. 책 보는 시간보다는 민원과 행정 처리로 하루를 보낼 것 같았다.

대학이나 전문 기관은 내가 희망하던 길이었다. 그러나 내가 속한 기술교육 분야는 매우 좁은 세계였고, 자리가 나야만 도전할 수 있었다. 그 자리를 노리려면 논문 실적을 꾸준히 쌓아야 했다. 아마 박사 졸업 후에도 논문을 계속 쓰며 삶의 무게를 그쪽에 두었다면, 지금쯤 나는 연구실에서 전혀 다른 글을 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하지만 그때의 나는 치열하지 못했다. 대학에 대한 막연한 기대만 품은 채, 논문을 독하게 쓰지 않았다. ‘대학 자리가 나올 때쯤 집중해서 쓰면 되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만 했다. 결국, 꾸준히 논문을 쓴 동기와 후배들은 대학교수가 되었고, 나는 여전히 이 자리에 머물러 있다. 논문을 쓰겠다는 다짐뿐이었던 내가 한심하기도 했고, 원하는 자리에 간 그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들이 나보다 더 많은 준비와 노력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그렇다고 나 자신에 대한 원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학위를 마친 2015년부터 지금, 2025년까지 10년 동안 나의 읽기와 쓰기는 변함없이 이어져 왔다. 아니, 시간의 복리처럼 조금씩 더 깊어지고 쌓여왔다.



2017년 6월 24일, 토요일. 그날은 내가 귀인을 만난 날이었다.

제주도 교육청 연수원인 탐라교육원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다. 6시간의 강의를 마치고 공항으로 향하려던 찰나, 담당 연구사님이 공항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했다. 감사한 마음으로 차에 올랐는데, 막 출발하려던 순간 연구사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어느 과학과 강사님이 강의실에 귀중품을 두고 왔다며 전해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우리는 귀중품을 찾아 공항 근처로 갔고, 그곳에서 경기도 과학과 수석교사였던 그분을 만났다.

귀중품을 건네받자 감사의 뜻으로 커피를 사겠다고 했다. 비행기 시간이 넉넉했기에 나도 함께하기로 했다. 50대 중반쯤 되어 보이던 이 수석 선생님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었고, 화제는 대부분 ‘수업’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처음엔 조용히 듣고만 있었지만, 곧 내 특유의 인터뷰어 기질이 발동해 이것저것 물었다. 놀랍게도, 그분은 어떤 질문에도 막힘이 없었다. 특히 내가 관심 있던 수업 자료 개발과 수업 기술(teaching skills)을 설명할 때는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깊이가 느껴졌다.


‘엇, 이분 뭔가 다르다.’


10년 동안 공부하며 길러온 나의 작은 안목이 그렇게 속삭였다. 한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눴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비행기 시간이 다가오자 아쉬움이 밀려왔다. “혹시 나중에 연락드려도 될까요?” 묻자, 그분은 흔쾌히 연락처를 건넸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감사의 메시지를 보냈고, 며칠 뒤 관련 자료도 몇 가지 받았다. 마음 같아서는 연가를 내고 경기도로 날아가 그분의 수업을 직접 보고 싶었다. 하지만 학교 일상에 치이고, 바쁜 나날에 적응하다 보니 그때의 뜨거움은 서서히 식어갔다. 그렇게, 잊혀졌다.



2018년, 나는 운 좋게 1년간 학습연구년을 보내게 되었다. 학교에 출근하지 않고,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연구년을 함께하는 동료들과 좋은 연수를 찾아다니며, 공개 수업이 열리면 함께 찾아가 수업을 보고 이야기 나누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그 수석 선생님이 떠올랐다. 5월의 어느 날이었다. 조심스럽게 전화를 드리니 나를 기억하고 계셨고, 수업을 보러 가도 되겠냐는 물음에 흔쾌히 “언제든지 오라”고 하셨다.

5월 29일 화요일, 아침 일찍 SRT를 타고 분당의 한 중학교로 향했다. 수석님은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수석실에 계셔서 대화하기도 좋았다. 오늘 수업의 과정안과 활동지를 건네받았다. 내가 온다고 따로 준비하신 건 아닌가 싶어 마음이 불편했지만, “매번 이렇게 쓴다”라고 했다. ‘수석교사는 이 귀찮은 수업 과정안을 매 차시 써야 하나?’ 속으로 궁금해했다.

3, 4교시에 5층 과학실에서 1학년 과학 수업이 있었다. 학생들이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자리에 앉아 교과서와 활동지를 펼쳤다. 낯선 이방인이 있다고 해서 의식하는 기색은 없었다. 수업 종이 울리자 수석님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진중했고, 교실의 공기도 무거웠다. 규칙과 통제 속에서 수업이 흘렀다. 중학교 1학년인데도 자유분방함은 보이지 않았다. 엄하게 훈련된 듯했다.

1.png 통일성 있는 학생들의 행동
2.png 수업에 집중하는 학생들

그런데 활동이 시작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동식물 카드를 분류하며 기준을 찾는 활동이었는데, 학생들은 생기 있게 움직였다. 활동지를 채우고, 짝과 의견을 나누고, 설명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통제와 자율이 절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흔히 공개 수업이라 하면 모둠 토의와 발표로 채워지는 형식적인 장면이 떠오르지만, 이 수업에는 그런 인위적인 꾸밈이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다시 수석실로 내려왔다. 묻고 싶은 것이 넘쳐났다.

“이건 왜 이렇게 하셨나요?”, “학생들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뭔가요?”, “어떤 의도가 있었나요?”

나는 내가 가진 교육학적 지식을 총동원해 질문을 쏟아냈다. 솔직히 말하면, 수석님의 실력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이 정도 물으면 얼버무리겠지 생각했지만,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내 모든 질문에 막힘 없이, 논리와 경험으로 답했다. 질문을 빙자한 일종의 ‘검증’이 끝났을 때, 나는 수석님을 신뢰하게 되었다. 그리고 버릇없게 질문한 나의 무례함을 반성하게 되었다. 수석님은 내가 지금까지 만나본 적 없는 그런 내공의 소유자였다. 진짜였다.

이후 학습연구년 동안 나는 몇 차례 수석님을 찾아뵈었다. 볼 때마다 존경심이 깊어졌고, 이분께 납작 엎드려 배워야겠다는 의욕이 생겼다. 틈만 나면 전화를 걸어 궁금한 것을 물었다. 물을 때마다 내 지적 호기심은 커졌다. 사람에게서 배운다는 것이 참 즐거웠다. 처음에는 내가 교육학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는데 하는 거만함이 있었지만, 이후에는 이것이 오히려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수석님의 지식과 경험에 비하면 나는 어린아이 수준이었다.



그렇게 배우며 연구년을 보내던 어느 날, 공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수석교사 선발 공문이었다. ‘그래, 저거다. 나도 수석님처럼 수석교사가 되어야겠다. 이론으로 쌓은 얄팍한 지식을 실천으로 바꾸며 나를 키워야겠다.’ 1차 서류 전형을 위해 관련 자료를 준비하고, 5쪽 분량의 업무수행계획서를 썼다.


공부하는 수석교사, 실천하는 수석교사가 되겠습니다.
글 쓰는 수석교사, 전문성 있는 수석교사가 되겠습니다.
소통하는 수석교사, 함께 성장하는 수석교사가 되겠습니다.


당시 내가 썼던 계획서의 활동목표였다. 수업 전문성으로 승부하는 수석교사가 되고 싶었다. 1차 합격 소식을 듣고, 2차 시험인 수업 과정안, 수업 분석, 면접을 준비했다. 과정안과 수업 분석은 내 박사 논문과도 맞닿아 있었기에 자신이 있었다. 마침 학습연구년 중이어서 공부할 시간도 충분했다.

그리고 12월 1일, 토요일. 임용고시 이후로 다시는 들어가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시험장에 앉았다. 그리고 종일 긴장된 마음으로 시험을 봤다. 그리고 며칠 뒤, 합격 소식을 받았다. 수석님께 전화를 드리니 누구보다 기뻐하셨다. 하지만 그 기쁨 뒤엔 묵직한 책임감이 깃들어 있었다. 수석님은 혹시라도 내가 이 길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게 되면,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계셨다. 나는 그 마음을 덜어드릴 방법이 없었다. 그저 잘 배우고, 잘 가르치는 길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7년 가까운 세월 동안 나는 매일 아침 출근길에 수석님과 통화한다. “이럴 땐 어떻게 하는 게 좋아요?”, “이 경우엔 활동지 질문을 어떻게 만들어야 효과적이에요?” 누가 보면 어른 둘이 시시한 대화를 나눈다고 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쌓인 작은 배움들이 내 수업의 내공이 되었다.

요즘은 예전만큼 열정적으로 묻지는 않는다. 대신, 어떤 현안에 꽂히면 수석님과 맞붙어 열띤 토론을 벌인다. 수석님은 정년퇴직 후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 모습이 나에겐 늘 자극이다.



앞으로 내가 쓸 몇 편의 브런치 글들은 수석님께 배운 것들을 조금 더 자세히 풀어내는 것이다. 또한, 수석님과는 또 다른 결의 내공을 지닌 수업 명인 한형식 선생님, 그리고 듀이 철학의 대가 박철홍 교수님에게서 배운 이야기도 함께 나누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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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란, 준비가 기회를 만났을 때 생기는 것이다.
Luck is what happens when preparation meets opportunity.


내가 좋아하는 말이다. 박사과정 시절, 지도교수님 연구실 벽에 걸려 있던 문구였다.

돌이켜보면 내가 수석교사가 되어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일종의 ‘운’이었다. 하지만 그 운은 우연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학위를 받은 뒤에도 꾸준히 공부를 이어왔고, 그것이 준비였다. 그리고 우연히 제주도에서 수석님을 만났을 때, 그것이 기회였다. 이분에게서 뭔가 특별함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나의 감각이 있었다.

내가 수석님을 발견한 그 순간이 내 인생의 큰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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