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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크M Oct 28. 2020

미래 내다보고 'IT 강국' 이끈 이건희 회장의 '혜안

반대 무릅쓰고 반도체 사업에 과감한 투자
질 경영 중시하며 휴대폰 15만대 불태우기도
'갤럭시' 개발 이끌며 스마트폰 1위 올려놔



1983년 취임사를 하는 이건희 회장 / 사진 = 삼성전자 제공


이건희 회장은 남다른 통찰력으로 '첨단 산업의 쌀' 반도체와 디지털 사회의 핵심인 스마트폰 등을 일찍이 미래 먹거리로 점찍으며 삼성을 '글로벌 IT 거인'으로 키워냈다.


이 회장의 일생은 1987년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는 취임사를 현실로 만들기 위한 여정이었다. 당시에 그 일성을 문구 그대로 믿은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결국 이 회장이 이끈 삼성은 첨단기술 분야에서 초일류 기업으로 거듭나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모두가 '불가능'이라 말하던 반도체, 세계 1위 '우뚝'


TV, 컴퓨터, 스마트폰, 자동차 등 디지털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우리 생활에 밀접한 전자기기 대부분에는 반도체가 필수로 들어간다. 반도체가 '산업의 쌀'로 불리는 이유다. 앞으로 디지털경제 시대를 이끌 인공지능(AI)과 사물인터넷(IoT), 자율주행차 등 첨단기술 분야에서도 반도체 기술은 필수 핵심 요소다. 


이 회장이 반도체 사업을 시작하려던 1974년, 이런 미래를 내다본 이는 많지 않았다. 오히려 TV 하나도 제대로 못 만들던 삼성이 당시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던 최첨단 산업인 반도체 사업을 한다는 걸 불가능히 여기는 게 논리적이었다.


2004년 반도체 현장 방문 / 사진 = 삼성전자 제공



당시 이 회장이 파산 직전의 한국반도체를 인수한다고 했을 때 모두가 반대했다. 일본의 한 기업 연구소는 '삼성이 반도체를 할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라는 보고서를 내놓으며 비판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언제까지 그들의 기술 속국이어야 하겠습니까?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일, 삼성이 나서야지요"라며 사재를 보태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다.


1986년 7월, 삼성은 1메가 D램을 생산하며 반도체 산업을 본격적으로 꽃 피우기 시작했다. 이후 삼성은 1992년 세계 최초로 64메가 D램 개발에 성공하며 기술 주도권을 확보한 데 이어, 생산량을 늘리며 1993년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 1위를 달성했다.


눈물의 화형식으로 이룬 '애니콜 신화'


반도체 성공에 이어 이 회장의 선견지명은 '애니콜' 신화로 이어졌다. 1993년 '신경영' 선언 이후 삼성의 신수종 사업으로 휴대폰 사업을 예견한 이 회장은 "반드시 1명당 1대의 무선 단말기를 가지는 시대가 온다"며 "전화기를 중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90년대 초 삼성은 '국내 제일'이라는 자만심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당시 미국, 일본 등 선진국 시장에서 삼성 제품은 여전히 '싸구려' 취급을 받고 있었다.


위기감을 느낀 이 회장은 1993년 2월 미국 LA에서 전자 관계사 주요 임원이 참석한 가운데 전자부문 수출상품 현지비교 평가회의를 주재했다. 당시 이 회장은 현지 매장에서 한쪽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놓여진 삼성 제품을 보고 "한쪽 구석 먼지 구덩이에 처박힌 것에다 왜 삼성이란 이름을 쓰나냐"며 통탄했다.


1993년 신경영 선언 당시 이건희 회장 / 사진 = 삼성전자 제공


이 회장은 1993년 6월7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삼성은 이제 양 위주의 의식, 체질, 제도, 관행에서 벗어나 질 위주로 철저히 변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삼성 신경영을 선언했다. 이후 삼성은 불량을 없애는 제품의 질부터 혁신을 시작했다.


질 중심으로 체질을 개선하려는 이 회장의 의지는 1995년 '애니콜 화형식'으로 표출됐다. 당시 삼성전자 무선전화기 사업부는 품질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완제품 생산을 추진하다 제품 불량률이 11.8%까지 올라가는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다.


이 회장은 "불량은 암"이라고 강하게 질타하며 불량 제품을 무조건 새 제품으로 교환해주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도록 했다. 이를 통해 15만대, 500억원 어치의 제품이 수거됐다. 이 회장은 이 제품들을 화형식을 통해 불태우고 임직원들의 불량의식도 함께 불태울 것을 제안했다.


자신들의 손으로 불타는 제품들을 보며 임직원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삼성의 휴대폰 사업은 일대 전환을 맞았다. 1995년 8월 애니콜은 당시 세계 휴대폰 시장을 호령하던 모토로라를 제치로 51.5%의 점유율로 국내 정상에 올라섰다. 당시 모토로라가 1위를 못한 나라는 한국이 유일했다.


SGH-T100


2002년 일명 '이건희폰'이라 불린 'SGH-T100'은 삼성의 '텐밀리언'(1000만대) 셀러 시대의 문을 열었다. 결국 삼성 애니콜은 2004년 세계 시장에서도 모토로라를 제치고 노키아에 이어 세계 휴대폰 시장 2위에 올랐다.


'1인 1스마트폰' 시대 선도한 삼성


'애니콜 신화'로 세계 휴대폰 시장에서 명성을 떨치게 된 삼성전자는 2007년 애플 '아이폰'이 스마트폰 시장을 열면서 다시 한 번 위기를 맞는다. 당시 휴대폰 시장을 주도하던 노키아, 모토로라, 에릭슨 등이 아이폰이 불러온 스마트폰 혁신에 대응하지 못하고 급속히 추락했다.


삼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2009년 한국에도 아이폰이 상륙하자 삼성전자는 '옴니아2'를 내놓고 대응했으나, '무늬만 스마트폰'인 제품으로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았다. 삼성 휴대폰을 최고로 생각하던 국내 소비자들 마저 아이폰과 옴니아를 비교하며 심한 격차를 느끼며 충격에 빠졌다.


삼성전자 '갤럭시S' / 시진 = 삼성 뉴스룸


2010년 삼성전자는 2008년 특별검사 수사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던 이건희 회장이 2년 만에 복귀하며 조직을 재정비했다. 이 회장은 경영 일선에 복귀하며 "앞으로 10년 내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라며 "다시 시작해야 된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앞만 보고 가자"고 강조했다.


복귀에 앞서 스마트폰이 대세가 될 것을 간파한 이 회장은 '스마트폰 일류화'를 강하게 주문하며 직접 첫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갤럭시S'의 제품 개발과 출시를 챙기며 진두지휘에 나섰다.


갤럭시S에는 '애니콜' 브랜드가 사라졌다. 삼성은 브랜드 가치가 5조7000억원에 달하던 애니콜을 포기하고 그룹의 역량을 집결한 '갤럭시' 스마트폰에 승부를 걸었다. 2011년 출시된 '갤럭시S2'는 성능과 디자인을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며 누적 4000만대 대기록을 달성하며 아이폰과 시장을 양분하기 시작했다.


이후 '갤럭시 노트' '갤럭시 폴드' 등으로 혁신을 거듭한 삼성 스마트폰은 2012년 이후 글로벌 시장에서 판매량 기준 1위를 지키고 있다. 이후 2018년 국내 스마트폰 가입자는 5000만명을 돌파해 이 회장의 선견지명대로 '1인 1스마트폰' 시대를 열었다.


끝없는 변화와 혁신…미래의 삼성은


이 회장은 2014년 신년사까지 "5년 전, 10년 전의 비즈니스 모델과 전략,하드웨어적인 프로세스와 문화는 과감하게 버리자"며 끝없는 변화와 혁신을 촉구했다.


2010년 CES에 방문한 이건희 회장이 3D 안경을 체험하는 모습 / 사진 = 삼성전자 제공


그는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불확실성 속에서 변화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시장과 기술의 한계를 돌파해야 한다"며 "핵심 사업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경쟁력을 확보하는 한편, 산업과 기술의 융합화, 복합화에 눈을 돌려 신사업을 개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와병 전 이건희 회장이 바라본 미래를 실현하는 건 후계자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해 전 삼성 임직원들이 풀어야 할 과제가 됐다. 삼성은 현재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 글로벌 1위에 오르겠다는 장기 비전을 비롯해 인공지능(AI), 5세대 이동통신(5G), 바이오 등 미래 사업을 추진 중이다. 



남도영 기자 hyun@techm.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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