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취득한 자격증이나 시험 점수 말고 당신이 궁금해요
이 일을 시작하고 새삼 놀란 점이 있었는데, 수많은 일본 기업들이 한국까지 넘어와서 채용 박람회를 열고 설명회를 개최한다는 것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기업들도 상당히 많았다.
평생 한국에 살며 다른 나라 취업을 생각해 본 적 없던 나로서는 낯선 광경이었다. 동시에 이렇게 열심히 사는 분들에게 누가 되면 안 된다는 책임감도 느꼈다.
꽃샘추위가 아직 가시지 않은 2019년 어느 봄날, 강남의 한 컨벤션 센터에서 일본 채용박람회가 열렸다. 나는 일본취업 컨설팅 부스를 맡아 하루 종일 그곳에서 똑같은 질문을 끊임없이 받고 있었다.
"내년 졸업인데 일본취업 시작하려고 해요. 시험 성적이랑 자격증 뭐 준비해야 해요?"
오전에만 스무 번은 들은 것 같았다. 토익 점수, 컴활 자격증, 학점. 모두가 똑같은 걸 물어봤다.
한국에서는 당연한 질문이지만 일본취업 쪽에서는 난감한 질문이다. 이과생들을 제외하고 명확히 줄 수 있는 답은 "일본어능력시험(JLPT) 외에는 크게 없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했다. "이게 맞아요?", "그럼 뭘 준비해야 하는데요?"
박람회가 끝나갈 무렵, 한 남학생이 부스로 다시 찾아왔다. 오전에 잠깐 상담했던 김윤수 학생이었다.
"아까 말씀하신 거 계속 생각해 봤는데요. 스펙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나는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신입사원 채용을 '신졸채용(新卒採用)'이라고 부른다. 한국처럼 취업 준비를 위한 휴학이나 졸업유예가 흔한 것도 아니다. 학생의 다음 단계로 사회인이 되는 인식이 강하다.
한국 기업들은 신입사원한테도 즉시 전력이 될 걸 기대한다. 그래서 직무 관련 경험, 자격증, 공모전 수상이 중요하다. 하지만 일본 기업들은 다르다. 신졸은 어차피 들어와서 가르쳐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게 기본 전제다.
그럼 뭘 보느냐. '키우기 좋은 인재'를 찾는다. 회사의 비전에 공감하고, 비즈니스 분야에 관심이 있으며, 지원자의 가치관이나 강점이 회사와 잘 맞는 인재.
나는 메모지에 몇 가지를 적어 건넸다.
내가 어떤 경험을 통해 어떤 '강점'을 가지게 되었는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관'은 무엇이고, 그게 지원 회사와 어떻게 맞는지
학생 시절 가장 열심히 했던 활동은 무엇이고, 그게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이런 질문들을 통해 '나'라는 인재의 캐릭터를 정의하고 어필하는 거예요. 이걸 '포텐셜 채용'이라고 부르는 거고요."
윤수 씨는 메모지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이게 맞나...?" 하고 중얼거리며 떠났다. 아마 다시는 안 올 것 같았다.
그런데 한 달 후, 예상치 못하게 윤수 씨가 1:1 컨설팅을 신청했다.
"저번 말씀 계속 생각해 봤어요. 처음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제 스스로가 '나'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더라고요."
학생은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빼곡히 뭔가가 적혀 있었지만, 여전히 '스펙 목록'에 가까웠다. 토익 950점, 컴활 2급, 학점 3.2...
"이건 여전히 스펙 리스트예요. 제가 궁금한 건 당신이 뭘 했느냐가 아니라 왜 했느냐, 그리고 그 경험이 당신을 어떻게 변화시켰느냐예요."
"그런 게 있나..."
"그냥 뭔가 대단할 필요도 없고 규모가 클 필요도 없고 스스로 해보고 싶어서 했던 거면 딱인데."
"어? 생각해 보니까 2학년 때 한 학기 휴학하고 친구들이랑 창업했던 게 있긴 해요. 근데 반년도 못 버티고 망했어요."
그 정체는 바로 대학생 타깃 중고 교재 거래 플랫폼이었다고 했다. 중고책방에서 헐값에 팔고 비싸게 사는 게 아까워서 학생들끼리 직거래하면 서로 이득일 거라 생각했다고 한다.
컴공 친구가 개발하고 본인이 기획과 마케팅을 맡았는데, 생각보다 사람들이 안 썼다고 했다. 알고 보니 다들 대나무숲이나 에브리타임에서 거래하는 게 더 편했던 것. 결국 개발비와 서버비 3백만 원을 날리고 접었다고 했다.
"아니 여기 있네요 윤수 씨가. 뭘 그렇게 헤매고 있었어요!"
"네? 그냥 잠깐 깔짝하다 실패한 건데 이걸 어떤 식으로 써요?"
"일본 기업들은 학생 시절 열심히 노력했던 경험, 특히 실패한 경험을 굉장히 중요하게 봐요. 실패에서 뭘 배웠는지가 그 사람의 성장 가능성을 보여주거든요."
윤수 씨는 여전히 의아한 표정이었다.
"지금 이야기 다시 생각해 보세요. 문제 발견, 가설 수립, 실행, 실패, 원인 분석. 이게 전부 PDCA 사이클이에요. 결과적으로는 실패했지만 그 과정에서 비즈니스의 본질을 배운 거예요. 고객이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시장조사가 왜 중요한지."
우리는 그날 2시간 동안 앉아서 그 6개월을 정리했다. 왜 시작했는지, 어떤 문제를 발견했는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 실패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3개월 후, 그 학생에게서 합격 소식을 들었다. 일본 IT 스타트업의 사업 기획 파트였다.
"면접에서 정말 물어보시더라고요. '가장 큰 실패가 뭐냐'라고. 창업 이야기 했더니 면접관들이 꼬리 질문을 계속하시는 거예요. 너무 깊게 파고 들어오니까 중간에 말이 꼬여서 망했구나 싶었는데, 결국 실패 경험 덕분에 입사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감사해요!"
퇴근 후 TV를 보며 소파에 멍하니 앉아 맥주를 마시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는 평생 '실패'를 이력서에 써본 적이 없다. 아니, 쓸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일반적으로도 굳이 실패한 이야기를 외부에서 한 일은 없었던 것 같다. 뭔가 내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고 좋거나 자랑하고 싶은 면만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윤수 씨는 창업 실패 덕분에 일본에서 새로운 길이 열렸다는 점에 너무나도 아이러니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정말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성공보다는 실패 경험에서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배움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는데, 왜 나는 그걸 한 번도 자랑한 적이 없을까.
실패를 말할 수 있는 문화. 실패를 배움으로 인정받는 시스템이 문득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이 살짝 모자라 맥주를 한 캔 더 땄다. 묘한 맛이었다.
*이 창작물에 담긴 이야기들은 저자가 2018년부터 일본 취업 컨설팅 업무를 수행하며 직접 경험한 사례들을 바탕으로 합니다. 조언의 내용과 인사이트는 실제 컨설팅 과정에서 얻은 것이지만, 등장인물의 이름, 학교, 회사명 등 개인을 특정할 수 있는 정보는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변경하거나 각색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