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취업 시장에서 가장 큰 무기는 '솔직한' 나 자신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일본취업에 '스펙'은 크게 중요치 않다. 하지만 이 말을 듣고 달려든 구직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게 있다. 바로 자기분석이다.
자기분석이란 '나'를 어필하기 위해 그간의 경험들을 되새겨서 시기별로 유의미한 에피소드를 정리하고, 내가 어떤 강점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정리하는 작업이다.
일본에서 취업활동을 하는 친구들은 이 작업을 성실히 거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를 낯설어하고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다.
2019년 6월, 테헤란로 아스팔트가 지글거리던 어느 날. 경영학 전공 송준하 씨가 답답한 마음에 무작정 1:1 컨설팅을 신청했다.
서울 중위권 대학 행정학과. 인턴십도, 대외활동도, 교환학생도 없었다. 그나마 했던 건 대학 들어와서 시작한 마라톤이 전부. 주변 친구들과 비교되는 탓에 스스로를 더 옥죄고 있는 듯했다.
"저 진짜 쓸만한 게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죠? 휴..."
"아니 대학 다니면서 매일 학교-집만 왕복한 건 아닐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한데 그냥 학교 다니면서 알바 조금 하고 운동한 게 다예요."
"운동? 무슨 운동하셨는데요?"
"마라톤이요. 대학 들어와서 시작했어요."
본능적으로 좋은 소재를 잡았구나라는 느낌이 온몸을 감쌌다.
"오? 얼마나 하신 거예요?"
"군대에서도 꾸준히 뛰었으니 6년 차 됐네요. 처음에는 3킬로도 못 뛰었는데, 지금은 풀코스 10번 완주했어요. 첫 풀코스가 4시간 30분이었는데, 작년에는 3시간 30분까지 줄였고요. 2학년 때부터는 러닝 동아리도 만들어서 지금 후배들 20명 정도 같이 뛰고 있어요."
그 순간 준하 씨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물어보지도 않은 훈련 계획 짜는 방법, 부상 예방하는 법, 페이스 배분, 동호회 후배들 관리하는 이야기를 신나서 쏟아냈다.
"지금 이야기한 것들 엔트리시트에 쓰면 되겠는데요?"
"네? 마라톤을요? 이게 무슨 스펙이에요..."
예상한 전형적인 반응이었다.
"6년 동안 꾸준히 한 거잖아요. 그것도 혼자 목표 세우고 계획 짜고 실행해서 기록을 1시간이나 단축했어요. 게다가 동아리까지 만들어서 운영하고. 이게 얼마나 대단한 '끈기'이고 '자기 관리 능력'이고 '리더십'인데요."
"하지만 친구들은 다 인턴하고 공모전 나가고..."
"혹시 체육회계(体育会系)라는 말 들어보셨어요?"
준하 씨가 고개를 저었다.
"말 그대로 체육 동아리를 한 지원자들을 일컫는 말인데, 일본 기업들이 엄청 선호해요. 특히 상사, 부동산, 방송 업계 같은 곳에서요."
"왜요?"
"일본 기업 문화가 '끈기'를 되게 중요하게 보거든요. 아무리 힘들어도 매일 출근해서 묵묵히 자기 일 하고, 팀원들이랑 호흡 맞추고, 힘들어도 버티는 거. 체육회계 출신들이 이런 거에 강하다는 인식이 강하거든요."
그러고 나서 메모지에 몇 가지를 적어 주었다.
6년간 꾸준함 = 끈기
스스로 훈련 계획 수립 = 자기 관리
동아리 운영 = 리더십, 협조성
기록 단축 = 목표 지향성
준하 씨는 여기서 에피소드 정리를 여기서 도와줄 수 있는지 물어보았고 나는 흔쾌히 응했다. 그렇게 우리는 그날 두 시간 넘게 앉아서 준하 씨의 6년을 정리했다.
왜 시작했는지, 어떻게 기록을 단축했는지, 슬럼프는 어땠는지, 동아리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등등.
그리고 연말즈음이 되자 준하 씨에게서 연락이 왔다. 중견 무역회사 영업직 합격 소식이었다.
"면접에서 '학생 시절 가장 열심히 한 게 뭐냐'라고 물어보셔서 마라톤 이야기를 했어요. 면접관들이 되게 관심 있어하시면서 '왜 6년이나 계속했느냐', '힘들 때는 어땠느냐' 이런 걸 계속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리고는 면접 다 끝나고 넌지시 이야기하시더라고요. '우리 회사에도 마라톤 동호회 있다'라고."
전화를 끊고 창밖을 바라봤다.
한국에서는 6년간 마라톤을 한 취준생을 보고 "그래서 뭐가 남았냐"라고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그 6년 자체가 '끈기'의 증거였다. 인턴이나 공모전보다 훨씬 설득력 있는.
결국 일본 기업들이 원하는 건 화려한 스펙이 아니라, 묵묵히 무언가를 해낸 사람이었다. 그게 창업이든, 마라톤이든, 아르바이트든 상관없이.
퇴근하자마자 잘 칠링 된 맥주를 한 캔 따서 벌컥벌컥 마셨다. 유난히 상쾌한 맛이었다.
*이 창작물에 담긴 이야기들은 저자가 2018년부터 일본 취업 컨설팅 업무를 수행하며 직접 경험한 사례들을 바탕으로 합니다. 조언의 내용과 인사이트는 실제 컨설팅 과정에서 얻은 것이지만, 등장인물의 이름, 학교, 회사명 등 개인을 특정할 수 있는 정보는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변경하거나 각색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