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모두에게는 각자의 시간이 있다

딱 한 개 기업만 설득하면 이기는 게임

by Teddy

일본의 채용시장은 전형적인 판매자 우위(구직자 우위) 시장이다.

그러다 보니 여유가 있는 기업들은 우수한 학생들을 경쟁사들보다 더 빨리 선점하고 싶어 했고, 이러한 경쟁이 심해지다 보니 4학년이 시작되지도 않은 학생들이 복수 기업에 최종 합격을 하여 내정을 받는 케이스가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이를 일본에서는 '조기선고'라고 표현한다.


2023년 3월에 나를 찾아온 박영재 씨는 이러한 조기선고 때문에 멘탈이 완전히 박살 난 상태였다.

"주변 친구들은 다 2월에 내정받고 지금 여유롭게 놀고 있는데, 저만 계속 떨어져요."


영재 씨는 도쿄 소재 중위권 사립대 경영학과 4학년. 스펙도 나쁘지 않았다. 인턴 경험도 있고, 일본어도 유창했다. 하지만 2월부터 8곳을 지원해 서류 6곳 통과, 면접은 전부 탈락이었다.


처음엔 괜찮았다고 했다. '다음에 잘하면 되지' 했는데, 자꾸 떨어지니 면접 볼 때마다 떨리고, 그러니 더 꼬이고. 그리고 지금 3월이니 좋은 회사들 채용이 다 끝나가는 것 같고, 이러다 정말 어디도 못 가는 거 아닌가 싶다고.

전형적인 악순환이었다. 주변과 비교하며 조바심 → 면접 긴장 → 불합격 → 더 큰 조바심.


"영재 씨, 혹시 이거 수능이라고 생각하세요?"

영재 씨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나를 쳐다봤다.


나는 메모지에 간단히 그림을 그렸다.

"수능은 모두가 같은 날 같은 시험 보고 점수로 줄 세우잖아요. 근데 취업은 달라요. 영재 씨는 100개 회사를 설득할 필요가 없어요. 딱 1개만 설득하면 돼요. 그 1개가 3월에 나올 수도 있고, 5월에 나올 수도 있어요. 중요한 건 빠르냐 느리냐가 아니라 나랑 맞는 회사를 찾느냐예요."


"하지만 주변은 다..."

"주변 친구가 2월에 간 회사, 영재 씨도 가고 싶었어요?"

영재 씨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그럼 안 맞는 거잖아요. 그 회사는 영재 씨 회사가 아니었던 거예요."

"그래도 떨어진 6곳 중에는 가고 싶었던 곳도 있었는데..."

"그 회사들 면접 볼 때 어땠어요? 정말 '여기 가고 싶다' 이런 느낌이었어요?"

영재 씨가 말을 멈췄다. 한참을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면접 보면서도 확신이 없었어요. '여기 맞나?' 싶은 곳도 있었고, '붙기만 하면 되지' 이런 마음으로 간 곳도 있었고."

"그럼 붙었어도 행복했을까요?"

영재 씨는 대답하지 못했다.


"영재 씨가 지금 힘든 건 떨어져서가 아니에요. '왜 나만 안 될까'라는 생각에 갇혀 있어서예요. 친구는 붙었는데 나는 왜 안 되지. 3월인데 아직도 못 구했네. 이러다 좋은 데 다 사라지면 어쩌지. 이런 생각들이 영재 씨를 조이고 있는 거예요."

영재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관점을 바꿔보세요. '빨리 끝내야 한다'가 아니라 '나한테 맞는 회사 찾자'로요."

"어떻게요?"

"우선 주변 보지 마세요. 친구들 합격 소식 듣기 싫으면 SNS 끄세요. 단톡방도 나가세요. 비교하는 순간 영재 씨는 계속 조바심에 시달릴 거예요."

"그리고요?"

"면접 볼 때 마음가짐을 바꾸세요. '붙어야 하는데'가 아니라 '이 회사가 나한테 맞나 보자'로요. 떨어지면 '안 맞았구나' 하고 넘어가면 돼요. 떨어진 게 실패가 아니라 매칭 실패예요. 애초에 안 맞는 조합이었던 거죠."

영재 씨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반기가 시작될 때쯤 영재 씨에게서 연락이 왔다. 5월에 뜬 외국계 IT 컨설팅 회사에 내정을 받았다고.

4월에도 2곳을 더 떨어졌지만 '내 타이밍이 아니구나' 하고 넘어갔다고 했다. 그리고 5월에 지원한 회사 면접에서 신기하게 하나도 안 떨렸다고. '여기 나랑 맞나 보자' 하는 마음으로 갔는데 면접관들과 대화가 잘 통했고, 합격했다고.


"그리고 깨달은 게 있어요. 2월에 붙은 친구들, 사실 지금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아요. 입사 전부터 걱정이 많고. 근데 저는 이 회사 정말 마음에 들거든요. 제 타이밍이 5월이었던 것 같아요."


가끔 보면 꽤 많은 사람들 취업 준비를 모두 같은 출발선에 서서 하는 달리기 경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늘 해왔던 대로 누가 먼저 결승선을 통과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건 달리기 경주가 아니다. 수천 개의 자물쇠와 열쇠가 각자 맞는 짝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어떤 열쇠는 빨리 찾기도 하지만, 어떤 열쇠는 찾는데 시간이 꽤나 걸린다. 하지만 맞는 열쇠만 자물쇠를 열 수 있다.

영재 씨는 5월에 자기 자리를 찾았다. 2월도 아니고, 3월도 아니고, 5월. 그게 그의 타이밍이었을 뿐이다.


모두에게는 각자의 시간이 있다. 남들보다 빠르다고 좋은 게 아니고, 늦다고 나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자기 타이밍을 기다릴 수 있는 여유다.


집에 도착해 맥주 한 캔을 땄다. 묵직하면서도 깊은 풍미가 느껴졌다.



*이 창작물에 담긴 이야기들은 저자가 2018년부터 일본 취업 컨설팅 업무를 수행하며 직접 경험한 사례들을 바탕으로 합니다. 조언의 내용과 인사이트는 실제 컨설팅 과정에서 얻은 것이지만, 등장인물의 이름, 학교, 회사명 등 개인을 특정할 수 있는 정보는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변경하거나 각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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