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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do Dec 27. 2021

한 손에 쥐고 순간을 그리고 뜯는 오렌지색 노트패드

로디아 노트패드 No.11

로디아 노트패드 No.11

 사람에게는 때가 있다. 어릴 적부터 그 말이 그렇게 듣기 싫었다. 공부해야 하는 때가 있고, 참아야 하는 때가 있고, 소질을 보이는 때가 있다. 이제야 무엇인가 되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 무엇인가가 되기 위한 공부를 했어야 하는 때를 놓쳤고, 그래서 참고 인내하면서 실력을 갈고닦을 기회도 없었다. 소질을 보이는 어린 나이에 내게 어떤 소질이 있는지 찾아보지 못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시도를 할 수 있다는 건지. 사람들이 말하는 내 때는 언제였을까.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그 시기를 지나쳐온 것 같다. 흥미를 보일 시기에 흥미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중학교에 입학하니 기술이라는 과목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정이라는 과목처럼 왜 이런 것을 배워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문구점에서 싸구려 모눈종이를 사 오라길래 사 왔고, 샤프를 준비해오라고 하기에 제도1000이라는 그 흔한 샤프를 형에게 빌려왔다. 준비물은 샤프와 자 그리고 모눈종이였다. 모눈종이는 파란 잉크 줄로 굵은 선과 얇은 선이 종횡으로 빼곡히 그려져 있었다. 몇 개의 정사각형이 있는지 세어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텅 빈 초록칠판에 서 있던 기술 선생님은 오른쪽에서 작은 칠판을 끌어왔다. 모눈종이와 비슷한 선이 그려져 있었다. 몸통 만한 긴 삼각자를 대고 그 칠판에 선을 긋더니 피라미드 모양의 삼각 도형을 그렸다. 칠판의 작은 정사각형을 모눈종이의 작은 사각형 9개가 모여있는 큰 사각형과 같다고 보고 그대로 그리면 된다는 것이다. 학생 수만큼 모양이 제각각인 피라미드가 만들어졌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나도 다양성을 마음껏 발휘했고 내게 모눈종이는 쇠창살처럼 디자인에 대한 관심을 가둬버렸다.


 그림에 대한 즐거움은 마찬가지로 미술시간에 사라졌다. 한쪽 눈을 감고 연필로 대상을 보라고 말하고 책상 위의 사과를 그려보라는 시간이었다. 왜 한쪽 눈을 감고 연필로 대상을 봐야 하는지 설명도 없었고, 그렇게 해서 흰 스케치북에는 어떻게 담아내야 하는지도 알려주지 않던 미술 선생님의 나태함 덕분에 입체감 없는 동그란 공을 그렸던 시간이었다. 옆에 있던 친구가 그리던 그림자만 그대로 가져다 베꼈는데, 공에 입체감을 준다고 너무 많은 선을 그어서인지 공과 그림자가 비슷하게 까맣게 칠해져 까만 팩맨을 보는 듯했다.


 노트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지금 보고 있는 대상이나 글의 주제에 맞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작게 그리면 비율도 좋아 보이고 그럴듯한 그림이, 조금만 크게 그리려고 하거나 잘 그리려고 하면 괴생명체가 됐다. 로디아의 오렌지색 노트를 본 건 한 달에 한번 정도 찾아가는 콘란 샵에서였다. 1층에서 오렌지색 노트패드를 판매하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다 어릴 적 아버지의 서재 한편에 꽂혀있던 오렌지색 메모패드가 떠올랐다. 싸구려 모눈종이와 달리 부담을 주지 않는 적당한 네모칸과 부드러운 촉감이 생생했다. 여러 크기로 노트패드를 사서 집에 왔다. 가장 작은 No.11를 왼손에 잡고 오른손에 무인양품 2B 연필을 들고 책상 위에 있는 것들부터 그려보기 시작했다. 노트패드에 그려져 있는 것과 같은 가상의 바둑판선을 상상해서 책상 위에 놓인 아이폰을 그렸다. 정확하지는 않아도 어떤 사물을 그렸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정도였다.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 페이지를 뜯고 집 안을 둘러보며 물건들을 마구 그리기 시작했다. 사람에게는 때가 있고, 그날이 나에게는 그 때였다.


 로디아의 No.11 노트패드는 스탬플 제본 방식으로 한꺼번에 뜯어지지 않고 탄탄한 뒷면의 하드보드지가 있어서 외형도 튼튼한 내구성을 갖고 있다. 어디서나 주머니에서 꺼내 한 손에 쥐고 그리거나 쓰는데 불편함이 없다. 마이크로 점선 컷팅 기술로 깔끔하고 쉽게 뜯어 쓸 수 있다. 제지기술로 유명한 프랑스의 밸럼 페이퍼를 사용해 잉크 번짐 없이 부드럽고 매끄럽게 쓸 수 있고, 뒷면에 글씨도 덜 비친다. 모델 크기는 No.10부터는 숫자가 커지면 크기도 커지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No.10 아래 숫자는 형태가 다르다. No.10은 너무 작다. 한 손에 적당히 잡히는 No.11이 알맞다. 크기가 주는 편안함이 있고, 소재가 주는 즐거움이 있다. 그래서 한 손에 쥐고 순간을 그려서 뜯는 No.11만의 즐거움이 좋다.




Rodia Notepad No.11

가격: ₩1,200 - 2,000 (로디아 한국총판 홈페이지에는 ₩1,600으로 책정)

크기: 7.4 x 10.5cm (A4의 1/9 크기에 해당)

장수: 80매 

속지: 격자, 세이지, 줄지, 무지, 도트




로디아 (RHODIA)

1920년 프랑스 제3의 도시 리옹에서 시작된 메모패드 브랜드다. 심벌마크에서 두 개의 나무는 회사를 설립한 두 형제를 상징한다. 유럽 최고 제지기술로 탄생된 벨럼 페이퍼를 사용해 어떠한 필기류에도 만족스러운 필기감을 제공한다. 폴 스미스와 여러 예술가, 디자이너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실용적인 노트 브랜드다.


로디아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rhodia_officiel/ 

로디아 국내몰 http://rhodiama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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