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최근 영국에서 축구선수의 주장 박탈이 이슈화됐다. 축구계에서 주장을 박탈하는 경우는 드문 일이다. 거의 없다. 게다가 그 이유가 구단의 동의를 얻고, 아픈 어머니를 보려 잠시 고향에 다녀오기로 약속했는데, 늦게 도착해서라면 더 드물고 이상하다. 영국 축구에서는 중요한 경기 전에 부모님의 사망 소식을 접한 선수가 장례식장에 가지 않고, 좋은 경기력으로 팀을 승리로 이끌고, 하늘을 향해 세레모니를 하면서 환호를 받는 경우들이 간혹 보인다. 젠틀맨쉽.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프로의식을 가지고 팀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 누군가에게는 멋지고, 나에게는 서글프다.
전문직이라고 할 때, ‘사’ 자가 뒤에 붙곤 한다. 한자로 같은 ‘사’를 쓰지 않는 직업들도 있지만, 그런 직업들은 공통적으로 한 분야에서 몇 년에서 몇십 년을 집중했을 때 얻게 된다. 시대의 흐름 때문에 지금은 사라져 버린 직업들도 있다. 계급과 함께 사라져 버린 집사란 직업도 있다.(어쩌면 이 직업은 여전히 있을 것이다. 드라마에도 있으니) 일을 잘한다고 할 때 주인정신은 꼭 언급되는 단어다. 예로부터 주인이 아니면서 주인의 마음을 가지고 일하는 주인정신의 상징은 집사였다. 주인의 안녕을 최우선으로 하는 프로. 베트맨을 보면 브루스 가문의 집사인 알프레드가 품위 있게 주인을 보필하는 모습은 감동까지 불러일으킨다. 영국의 젠틀맨 하면 집사가 떠오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자신보다 일을 더 중요시 여기며 삶을 바치는게 잘 사는 것일까? 일의 방향과 옳고그름을 외면한채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게 일을 잘하는 것일까?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에서는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은 대대로 집사다. 주인의 파티를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 아버지가 저택의 위층에서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집사의 할 일에 최선을 다한다.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지도 못하고, 다른 하인을 통해 전해 듣는다. 몇 층 올라가면 있는 아버지인데. 그렇게 맹목적으로 평생을 주인에게 충성하며 섬긴다. 이제 은퇴를 바라보는 그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평생을 섬겨온 주인이 나치 지지자였다는 진실 앞에 의젓하게 지켜온 명분과 신뢰가 허망하게 무너져 내린다. 이 소설은 달링턴 홀의 집사로 평생을 보낸 스티븐스가, 젊은 날 사랑했지만 떠나보냈던 켄턴 양이 보내온 편지를 곱씹으며 그녀를 찾아가는 6일간의 여행길에서 그의 인생을 회상하는 이야기다. 주어진 일의 이면에 무엇이 있고, 과연 잘하고 있는 것인지를 묻는다. 질문하지 않는 자에게 남아있는 나날을 보게 한다. 상사로부터 칭찬을 받고 있으니 스스로도 잘하고 있다고 뿌듯해하고 있는 나. 그래서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나를 볼 수도 있다.
가격: ₩15,000 (온라인 10% 할인시 ₩13,500)
크기: 388쪽, 127*188mm
출판사: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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