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언터쳐블: 1%의 우정>을 감상하고
코로나19로 집에 갇혀있으면서 고된 고3생활을 마친 딸아이와 TV로 철지난 무료영화를 감상했다. <언터쳐블: 1%의 우정>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한 영화다. 클래식과 팝의 어울림이 멋졌다. 주인공 필립은 부자다. 상위1%다. 그러나 사고로 온몸이 마비되어 머리아래는 움직일수 없다. 매년 생일마다 자신의 신하들이 클래식 앙상블의 공연을 집 거실에서 열어준다.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음악이 흐른다. 하나도 기쁘지 않다. 하지만 하위1% 무일푼 백수 흑인 드리스는 자신이 좋아하는 pop음악을 앙상블에게 요청한다. 흑인 몸종 드리스는 주인공앞에서 댄스를 하며 흥을 폭발한다. 둘만의 진정한 기쁨의 생일파티를 시작한다. 이 장면은 서로의 취향과 선호도를 무시한듯하지만 아니다. 서로의 음악을 격의없이 나누며 소통한다. 서로를 이해하며 기쁨을 공유한다. 그 순간 둘은 행복했다. 친밀해졌다. 저는 이런 것이 음악치료가 아닐까 생각한다. 음악치료에서 말하는 긍정적 변화로 여겨지는 순간이었다.
교재를 읽는 내내 음악치료전문가의 정의와 역할부분을 언급할 때 상당히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음악이야말로 듣고 싶을 때 자발적으로 들으며 영화의 필립과 드리스처럼 카타르시스를 느끼면 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계속적으로 들었다. 물론 스스로 음악을 선택할 인지적 능력이 없는 특수한 노인의 경우는 제외하고 말이다. 음악치료에서 왜 굳이 음악치료전문가가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이 든다. 반면 음악, 문학, 드라마치료 등등이 건강보험의 적용을 받는다면 어떨까하는 조금은 생뚱맞은 생각이 떠올랐다. 위에 언급한 예술치료들이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힘이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현대인에게 그 어떤 수술보다 유용한 치료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음악치료의 힘을 경험한 일이 있다. 몇해전 실제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친구의 찬송가를 어렵사리 들었던 추억이 있다. 당시 우렁차지는 않았지만 진정성있는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삶의 애착을 놓지 않고 대체의학 치료중이던 친구는 말했다. 병이 낮는다면 학교에 복귀하는 날 학생들과 동료교사들 앞에서 부르겠노라며 희망에 부풀어했었다. 병을 고쳐준 분이 하나님임을 널리 알리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친구는 끝내 학교에서 찬송가를 부르지 못했다. 대신에 그때 친구의 독창을 듣던 내가 지금은 찬양대에서 합창을 한다. 그 친구가 살아있다면 무엇을 가장 하고 싶어할까를 생각해보고 내린 결정이다.
음악은 확실히 힘이 있었다. 내 안에서 치유가 일어나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찬양대에 설때마다 나는 친구를 기억하곤한다. 벌써 음악은 이렇게 우정을 이어주는 힘이 있지않은가! 마치 친구와 함께 찬양하는 착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때로는 친구가 빙그레 웃고 있을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