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을 기다리며

시&노트

by 여상

[목련을 기다리며]


계절이 오가는 길목에 앉아

나무 아래 떨구어진

햇살 한 조각을 만져 봅니다.

제게 주신 약속은 아니었지만

올 것들이 하나 둘 돌아오고,


꽃몽우리 새 창에

손은 언제 드는지

눈이 오고 또 녹은 자리,

빼꼼히 내다보는 얼굴이 눈부셔,

가슴 푸르게 젖어드는

아침이었습니다.


소리 없이 꺼내 놓은

버선발 디딤,

저만큼 비켜서 달라는

낯가림의 속내를,

아지랑이 아뜩한 먼발치에

휘청이는 봄날로 바라니다.


오래지 않아 무심히

당신은 돌아섭니다.

야속한 비바람,

소리 참은 울음으로

핏물 바랜 옷자락을 쓸어 담던

내 거친 손끝의 상처들,


그 모두 황홀했던

그대의 시간이었다,

말하겠습니다.


저무는 봄날,

달보다 맑았던 얼굴.


그대는 그렇게

내 기다림 안에서 살다가

이별을 위해서만 잠시 다녀가시니,

해마다 바닥이 긁히는 그리움으로

나의 강은 점점 깊어만 가고,


덧없이 떠나보낼 것을 알면서도

자락길 잰걸음으로

그대에게 가는 뜻은, 오직

달밤의 약조에 기대는 것.


그대는 그저 하얀 달빛으로

천천히 오십시오.


어느

맑은 바람 일면

잔망스러운 산수유 꽃무리를 지나

헐벗은 나무 아래, 나는 또

그대를 기다리겠습니다.




Poet's note

따사한 햇살이 대기를 감싸 주는 아침, 산책길을 나서니 아직은 아침 공기가 찬기운을 제법 머금고 있었다. 마을 앞산 등산로를 따라 조금 올라가 보기도 하고, 산죽길을 헤치고 나가 낙엽송 숲도 걸었다. 남쪽 마을에서는 꽃소식이 전해져 오는데, 우리 마을 봄은 어디까지 왔을까 하고 뒤적거려 보는 것이다.


물길을 따라 걷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가로 내려가 보았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아직은 이르겠지 하며 물속을 내려다보는데, 알을 깨고 나온 치어들이 유속이 잔잔한 물가에 옹기종기 모여 놀고 있는 것이다. 애들이 놀랠까 싶어 살금살금 다가가 앉아 한참을 쳐다보았다. 고맙고 기특해라.



다리를 건너 돌아오는 길에 또 한 번 반가운 친구를 만났다. 마을공원 어귀에 산수유가 이제 막 꽃망울을 터트린 것이다. 연약한 가지에 콩고물 뭉친 듯 올망졸망 노란 꽃을 피운 산수유에게도 수고 많았다고 인사를 했다.


산수유가 피었으니 이제 백목련이 올 차례되었다. 마을 근처에 목련이 흔하지가 않아 몇 군데 눈도장을 찍어 두고 있는 참이다. 옆마을 실상사 절 마당에 몇 그루가 있고, 마을 창고 옆에, 그리고 후배부부가 운영하는 카페 앞에 어린 백목련이 한 그루씩 있고, 오도재 길의 롯지 마당에도 몇 그루가 서 있다



목련은 큰 꽃망울을 지닌 채로 겨울의 후반을 지낸다. 이제나 피려나 저제나 피려나, 오며 가며 꽃망울과 눈을 맞추다 보면, 어느새 마당에 슬그머니 들어와 꿀벌들과 놀고 있는 봄과 마주하게 된다.


새봄의 어느 꽃이 귀하지 않겠는가마는 막 꽃망울을 터트리고 나온 백목련 비길 곳이 없다 싶을 정도로 눈이 부시다. 옷깃을 여민 듯 아직 꽃술을 감추고 있을 때의 어린 모습은 보는 이의 넋을 잃게 하는 것이다. 그 순수함이란! 황금색 꽃술을 넌지시 드러낸, 성숙해진 목련의 우아함은 또 어떤가.모습들이 너무도 아름다워 해마다 봄이면 목련꽃이 오기를 많이 기다리게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목련은 오랫동안 머무르지 않는다. 금빛 꽃술을 드러내고, 꽃잎을 활짝 열었다 싶으면, 이미 꽃은 떨어질 준비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꽃잎은 시들게 되고, 시든 꽃잎은 변색이 되어 땅으로 뚝뚝 떨어진다. 떨어진 모습이 유난히 곱지 않아 보이는 것은 꽃잎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너무도 순결하고 우아했던 자태와의 극적인 대비 때문이 아닐까?


아름답고 영화롭던 모습도 목련이요, 떨어져 나뒹굴다 이리저리 밟히는 처연한 모습도 목련이니, 그 짧은 시간 안에서 생로병사와 순환의 무상함을 얻어 보게 된다. 내가 목련의 계절을 애정하는 이유이다.



그렇다고 아직 오지도 않은 목련의 갈 길을 미리 애도하다니, 봄기운에 들떠 감성질이 과했다 싶다.


산수유가 피었으니 곧 백목련이 올 것이다. 목련이 오면 곧이어 개나리와 진달래가 차례로 올 것이고, 물가를 따라 조팝꽃들이 탐스럽게 열리고, 가로수길에 벚꽃이, 산에는 산벚들이 피어오를 것이다. 골짜기 넘어 본산의 봉우리들에는 아직도 백설이 성성하지만, 이미 봄은 성큼 마을에 들어와 있었다.



p.s. 작년 이맘 때 썼던 산문시를 연시로 손을 보아 다시 올렸습니다.


#봄 #목련 #산수유 #치어

사진. 클라우드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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