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지

by 여상

[파지]


어젯밤 당신과 나눈 침방울을

겨우내 밭고랑에 눕힌

마른 고춧대에 앉은

무서리에서 찾아보았다


무서리에 거닐다 간 새들의 발자국에서

허공에서 말라버린 허연 돌배 몇 개에서


소주에 절은 담배꽁초들에는

잘근 씹은 말들과

뭐라고 글씨가 쓰여 있었다


아무거나 물기 좋아하는 까마귀도

주워가지 않은 말들을

찾아보려

신발 바닥으로 젖은 풀 헤치며

안산골로 넘어가는 가파른 언덕 골목 끝까지

걸어갔다 돌아오는 길


남이 먹다 흘린 습기를 뒤져

용도가 폐기된 생활을 들추며


골이 파인 종이를 골라 찾는 노인의 리어카에는

말이 적힌 종이들이 제본처럼 가지런히 쌓이고


종이를 팔아 숫자로 바꾸어 놓은

손바닥 크기의 밭뙈기에서는

숫자를 심어도 너른 잎은 자라지 않았다


해가 오르자 내가 찾던 말들은 녹아버렸다

침방울들은 깊은 골판을 따라 축축하게 흐르고


내 책장만큼이나 차곡히 높아진 노인의 리어카가

뿌듯하게 경사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가끔씩 허공을 딛는 노인의 신발을

먼발치 빈손으로 따라 걷는다







#파지

Image. Pixabay

매거진의 이전글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