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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오 이시구로 『나를 보내지마』

정해진 운명을 향한 무저항에서도 영혼은 빛난다

by 책 읽는 호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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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삶은 이미 정해져 있단다. 성인이 되면, 심지어는 중년이 되기 전에 장기 기증을 시작하게 된다. 그거야말로 너희 각자가 태어난 이유지. 너희는 비디오에 나오는 배우들과 같은 인간이 아니야. 나랑도 다른 존재들이다. 너희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미래가 정해져 있지.




놀랍다. 경이롭다. 그만큼 아름답다. 그만큼 처절하다. 이렇게 슬프고 기구한 운명을 이렇게 잔잔하고 아름답게 풀어낼 수 있다는 것에 박수를 치고 싶다. 정말 대단하다.



장기 기증을 위해 태어난 존재, 탄생과 동시에 선고된 운명 아래에 살아가야만 하는 '클론'. 이 저서는 앞서 말한 소재를 이용해 굉장히 많은 담론을 자아낸다. 복제 인간을 이용한 장기 이식을 중심으로 한 인간의 존엄성 문제, 복제 인간의 삶의 영혼을 통한 존재 그 자체에 대한 통찰 문제, 거대한 계약에 따른 먹이 사슬 관계를 중심으로 한 사회적 문제. 그 어떤 주제로 글을 푼다 한들 저서는 그것들을 품을 수 있을 만큼의 담론의 깊이를 자랑한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짧게 의견을 이야기하자면, '클론'을 만들어 장기 이식을 진행하는 건 명백히 잘못되었다. 인간과 복제 인간의 기준을 어머니의 자궁에서 분만해 세상에 나온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닌 이상, 인간과 복제 인간은 다름 하나 없다. 모든 존재는 살기 위해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죽기 위해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존재는 태어난 이상 '살아가는 존재'다. 각각의 삶을 정의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살아가는 존재' 자신이다. 그 누구도 타인의 운명을 선고할 수 없다. 탄생과 죽음에 그 어떠한 목적도 부여할 수 없다. 이 담론은, 인간의 존엄성을 넘어 존재의 이유에 대한 화두다.



그래서 내가 적은 첫 번째와 두 번째 담론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문제에서 존재 그 자체에 대한 통찰로. 이 생각들이 주인공들이 느끼는 운명에 대한 암묵적 동의, 무저항이 더욱 슬프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은 운명에 있는 힘껏 저항하지도 않았고, 기구한 운명 속에서도 영혼을 찾고, 꿈틀거리려 무던히 노력했다. 사실, 운명을 거스를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거대한 사회 계약에 따른 먹이 사슬은 우리가 돼지나 소를 사육하고 도축하는 과정들과 빗대어 생각할 수 있겠다. 인간이냐 아니냐가 큰 쟁점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결국 제한된 구역에서 정해진 기간만큼 키우고 인간의 모종의 목적을 위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다. 결국, 이 책을 읽고 불편해하는 독자들에게 스스로의 모순을 느끼게 하려고 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이 인간을 위해 정해진 운명을 선고받은 존재들에게는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않으니까.



담고 있는 메시지만으로도 굉장히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하지만, 소설적으로도 매우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과거 회상 형식의 구성으로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독자들에게 알려줬음에도, 스토리의 흥미진진함을 잃지 않고, 오히려 독자들이 깊이 몰입할 수 있게끔 적절한 친절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흡입력을 끌어올린다.




영화도 볼 생각이다. 이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서사를 영상으로 어떻게 풀어냈을까 궁금하다. 그들은 과연 순간들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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