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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01

죽음의 최초 인식에 대한 질문과 죽음의 표상의 역추적

by 책 읽는 호랭이

빅토르 위고의 『웃는 남자』를 읽던 중 나를 침잠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 하나의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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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흔히 자살이라고 지칭하는 파옥(破獄)을 모른다."


이 문장을 읽고 '그렇다면 언제부터 자살 혹은 죽음이라는 개념에 대해 인식하게 되는 것일까?'라는 반문이 떠오르게 되었고, 이윽고 충동적인 마음으로 짧고 짜임새 없는 글을 쓰게 되었다.


한 개인에게 죽음이라는 개념의 최초 인식 시점은 언제일까? 어린 아이 시절에 무심코 죽였던 벌레에게서? 아무런 생각 없이 꺾었던 꽃에게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죽음의 최초 인식 시점에 대한 추적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 인식했는지도 모를 이 추적불가능한 죽음을 언제부터 내 삶으로 끌어오게 되었을까? 아마 아버지의 죽음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 대상을 아버지로 한정지은 이유는 친척의 죽음에서조차 나는 죽음의 피할 수 없는 절대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나는 죽음이 주는 파급효과를 느끼기 시작했고, 그 순간부터 내 삶에 분리시킬 수 없는 구성요소로 그것을 대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물었다. "왜 죽음이라는 것에 관심이 많은 거야?" 명쾌하게 대답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데,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는 절대 죽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니까." 죽지 않을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숨겨져 있다. 죽음이라는 개념을 삶에 투영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죽는다'라는 불가피한 상황을 인생에 상정하지 못하는 경우와, 그 개념을 인식하고 있지만 애써 부인하고 싶은 경우.

그런 사람들에 대한 반발심으로 생긴 관심은 아님을 밝히고 싶다. 꽤 순수한 호기심이다. 스스로의 삶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것과 인생의 방향 설정과는 무관한 정해진 최종 도착지에 대한 고찰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사유의 과정일 것이다. 도착지가 어디인지는 알아야 제대로 가고 있는지 점검이 가능할 것이 아니겠는가.

누군가 물었다. "그래서 네가 바라보는 죽음이 무엇인데?" 미간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죽음은 죽음 그 자체일 뿐이며, 결국엔 그 피할 수 없는 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가 핵심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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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맞이할 죽음에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여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 삶의 모든 순간들은 그 의미 부여 속 하나의 구성요소가 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삶은 죽음을 위한 여정과도 같다. 결과적으로, 그 여정이 끝나는 시점에 내가 내리는 총평이 죽음을 대하는 나의 마음과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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