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백치』
그리스도 같은 인물을 창조하고 싶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므이쉬킨 공작의 최후를 구상하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처음부터 그런 인간은 세상에 마땅히 설 자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럼에도 설 자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선인의 표상이기도 한 그리스도는 그의 최후를 생각해 본다면, 선인으로서의 최후라고 보기는 힘들다. 당대 최고형이던 교수형에 처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람의 최후의 모습을 갖고 그 인간상에 대한 세계에의 적합성을 평가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이나, 최후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한순간이 아닌 여러 순간의 연속의 결괏값이기 때문에 나름의 해석은 가능할 것이다. 므이쉬킨 공작의 작중 최후는 그리스도와 비교하면 어떠한가. 순수하고 연민을 깊이 느낄 줄 아는 선인 그 자체인 공작은 그리스도만큼 잔혹하지는 않을지언정 그만큼 가혹하다고 할 수 있는 최후를 맞이한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백치'라 불리는 혹은 불릴 수 있는 자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영영 세계의 이방인으로 주변을 맴돌다 떠나는 것이 전부인가? 그들은 세상에 의미 없는 존재에 불과한가? 『백치』는 그렇다고 말하지 않는다. 온갖 치정과 사건사고 속에서 므이쉬킨 공작의 수난 속에서 '아직' 백치라 불리지 않는 순수한 양심을 가진 어린아이들이 있다. 세상에 찌든 누군가에게 공작은 '백치'일지 모르지만, 순수한 어린아이들에겐 존경해 마지않는 포용력 있는 '어른'으로 비친다.
백치는 사실상 한 인간이 한 대상의 특징 바라보며 내리는 일종의 표식과도 같다. 키 큰 사람 보고 거인이라고 하듯, 우린 순진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것 같은 사람을 보고 백치라고 한다. 한 개인 내지는 집단이 '백치'라고 정의하더라도 그 정의에 머무를 이유 따위는 없다. 즉, 백치란 일방의 평가일 뿐이라는 것이다.
므이쉬킨 공작은 누군가에게 '백치'로서 가혹한 결말을 맞이하지만, 그를 바라보며 미래를 그려갈 아이들은 '선인' 내지는 '연민의 정이 깊은 사람'으로 기억하며 쾌유를 기원할 것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백치가 이 세상에 존재할 공간을 찾는 건 의미가 없다. 백치는 어디에도 있을 수 있고, 어디에도 없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나 이외의 존재로 인해 스스로의 존재 가치가 흔들리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백치이든 말든, 심지어 선인이든 말든 딱히 상관없다. 세상을 살아가는 건 백치라 나를 평가하는 누군가가 아니라, 나를 무엇으로 정의해야 할 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