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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흘러가는 삶에서 마침내 깨어나 방향을 틀다

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 』

by 책 읽는 호랭이

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의 형태와 색채, 멜로디를 주는 경험은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몇십 년간 지속해 온 무언가를 다 던져버리고, 내가 가고 있던 방향과는 전혀 다른 어떤 방향으로 과감하게 틀어버릴 수 있는가? 어떤 것을 계기로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성찰을 통해 스스로를 찾아나가고자 하는 주인공 그레고리우스의 용기에 새삼 대단함을 느낀다.


아마데우 프라두 라는 인물이 쓴 책 '언어의 연금술사'를 접하며 그의 생을 탐험하고, 그의 삶 전체에 녹아든 생의 통찰을 통해 그레고리우스는 이전과는 다른 실존하는 자가 되려고 한다.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라는 말이 그의 뇌를 관통한다. 우리의 인생은 살아지는 수동이 아니라, 살아가는 능동의 무엇이다.


프라두와 그레고리우스는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태생부터 삶의 시대적 배경까지 모두 달랐지만 그것을 초월하는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죽음의 체감 유무가 아닐까 싶다. 뇌동맥류라는 시한폭탄을 머릿속에 안고 있던 프라두는 자신이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그 죽음의 목도 앞에서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혹독한 자신만의 환경 안에서 생의 소중함을 온몸으로 느꼈다. 프라두는 살아지는 대로 살아갈 수 없었던 게 아닐까? 삶이 너무나도 소중해서, 그냥 흘러가게 둘 수는 없었던 게 아닐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레고리우스와 같다. 죽음은 먼 일이다. 죽는 건 알지만 왠지 모르게 멀리하고 싶고, 나에게는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듯하다. 이런 글을 쓰는 나조차도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레고리우스처럼 생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는 어떤 열차를 타야만 한다.


다른 이야기지만, 그레고리우스가 프라두의 글에 홀려 삶의 의미를 재정립했듯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울림을 주는 글을 쓰고 싶고, 그런 존재이고 싶다. 내가 죽어서 사라지고 난 뒤라도, 내가 남긴 강한 존재의 흔적인 글을 누군가가 발견하고 내 생을 그의 시선으로 재구성해 줬으면 좋겠다. 그런 내 바람이 실현된다면, 나는 아마 죽었지만 죽지 않은 게 아닐까? 내 정신의 모든 것이 그곳에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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