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극복과 자아정체성의 확보
당신은 언제나 내게 친절했어요. 하지만 우리 집은 그저 놀이방에 지나지 않았어요. 나는 당신의 인형 아내였어요. 친정에서 아버지의 인형 아기였던 것이나 마찬가지로요. 그리고 아이들은 다시 내 인형들이었죠. 나는 당신이 나를 데리고 노는 게 즐겁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놀면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요. 토르발, 그게 우리의 결혼이었어요.
116p
짧은 만큼 강렬한 메세지가 담겨 있다. 단 한 가지의 핵심적인 사건을 통해서 모든 관계를 구축하고, 사건이 드러남과 동시에 작가가 원하는 스토리를 개척해나갈 수 있었다. 희곡임에도 굉장한 가독성을 자랑하고, 실제로 눈앞에 글이 상상으로 구현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노라는 분명한 죄를 저질렀다. 서명을 위조해 돈을 빌린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단편적이고 객관적으로만 판단하면 노라는 죄인이 맞다. 하지만 가족 관계에 있어서 이 죄를 통해 남편인 헬메르에게 비난을 받아야 하냐고 재질문을 해보면 역시 노라는 남편에게만큼은 죄인일 수 없다. 왜냐하면 남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서명을 위조해 돈을 빌린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꽤 주목할 만한 점은 거짓말로 인해 헬메르에게 비난받은 노라의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노라는 헬메르의 태도를 통해 자신의 결혼이 여태 진정한 결혼이 아닌 하나의 '놀이'에 불과했음을 깨닫고 자아정체성을 확립하기에 이른다. 확립하는 과정에서 노라는 그의 범죄 행위조차 옳은 것임으로 판단하고 헬메르의 태도만이 잘못됐다고 단정 짓는데, 절대적인 법을 어겼다는 죄책감보다는 자신은 옳은 일을 했다는 확신감이 더 큰 이 과정이 참 인상 깊게 다가왔다. 극단적인 예로 들자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죽인 경우에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거랑 비슷한 맥락이라고 보인다. 이런 생각이 어떻게 보면 참 위험해 보이기는 한다. 얼마 전, 한 살인마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싸이코패스가 양아치를 죽인 것뿐이다. 죄책감은 전혀 없다. 다시 태어나도 나에게 죽을 것." 이 싸이코패스의 사고 메커니즘이랑 죄를 합리화한 채로 자신의 옳음을 밀고 나가는 사고 메커니즘이랑 비슷해 보이는 건 나뿐인 걸까.
가부장적 사회에서 한 가정을 이루는 도구로밖에 취급받지 못한 노라는 역시 신여성을 표방할 만큼 주체적이고 멋진 여성이다. 남편에게 '종달새'로 불리며 마치 집이 새장이라도 된 듯, 철저히 억압받고 통제받았던 노라는 범죄 행위와는 별개로 가장 이상적인 길을 갔다고 생각한다. 남편을 박차고 나가는 모습과, 정신적 충격에 좌절하지 않고 극복해나가는 모습이 성별을 떠나 역경을 극복하는 좋은 자세라고 생각한다.
1막에서는 노라가 철부지 같은 모습으로 많이 묘사가 됐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해가 간다. 특정 날짜를 기점으로 집이 엄청난 부를 쌓게 되는데 그 누가 신나 하지 않을까? 월 300 받던 사람이 다음 달부터 월 3000을 받는다면 아마 신나서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일 것이다. 그래서 1막을 읽고 낭비벽이 심한 노라를 보고 '저런 습관들로 인해 무언가 사단이 나겠구나.' 했는데 전혀 예상이 틀렸다. 사건 전개를 위한 밑밥에 불과했던 것이다.
사랑으로 한 가정이 파탄 나고 한 가정의 시작이 이루어지는 대조를 보고 참 씁쓸했다. 사랑은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줄 수도 있지만 엄청난 파괴를 가져올 수도 있다. 심지어 사랑 속에 가려진 파괴를 보지 못하고 살아갈 수도 있다. 극과 극을 한 끗 차이로 내달리는 게 바로 사랑이 아닐까. 어제의 열렬한 사랑이 오늘의 참담한 비극이 될 수 있는 것. 그렇게 잔인한 게 사랑이고 결코 거스를 수 없는 절대성을 가진 게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