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적이지 않은 일상들을 관조하다
수록된 단편 목록
<깃털들>, <체프의 집>, <보존>, <칸막이 객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비타민>, <조심>, <내가 전화를 거는 곳>, <기차>, <열>, <굴레>,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는 <대성당>을 통해 알고 있던 작가다. 미국 단편소설의 대가로도 불리고 실제로 많은 영향을 준 작가로 명성이 자자하다. <대성당>을 꽤나 인상 깊게 읽었던 기억이 남아 있어서, 이 작품이 포함된 단편집을 빌려서 읽어보았다.
이 단편집의 모든 단편은 일종의 코드를 공유하고 있다. 그 코드 중 하나가 바로 '무미건조함'이다. 주관적인 감상이지만, 카버는 이 무미건조함을 의도적으로 작품에 녹여냈다고 생각이 든다. 단편들에 나오는 인물들과 각각의 소재들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먼 이야기 같지만, 우리들의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들이다. 가령, 사랑에 대한 내적 갈등이나 알코올 중독, 육아 문제, 집 문제, 돈 문제 등등이 그렇다. 실제 우리가 심각하게는 겪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큰 것들이지만,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일상적인 것들이다. 이런 것들을 카버는 관조적이고 무미건조한 문체를 사용함으로써 더욱더 일상적인 것처럼 보이게끔 한다.
이런 문체 덕분에 지나치게 차분해져 감정이 파도치지 않았다. 뭔가 문체에 따라 덩달아 나도 침착해져서 관조적으로 활자들을 읽어나가게 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재밌게 읽지는 못했다. 작품들이 뛰어나고 안 뛰어나고를 떠나서, 깊이 빠져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아직 내가 많이 부족하구나 하는 걸 느끼기도 했다. 카버를 온전히 느끼지 못하고, 왠지 그가 설치한 장벽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느낌에 살짝 좌절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아직 내공이 한참 부족한 탓이겠다만, 이러면 승부욕이 자동적으로 생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카버를 온전히 느낄 수 있을 때면 분명히 내가 성장해 있을 때니까 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대성당> 때문에 고른 단편집이지만 역시 <대성당>이 제일 재밌었다. 몇 번을 읽었던 작품이라 그런지 이해도 훨씬 잘 됐다. <비타민>도 꽤 흥미롭게 읽었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먼 이야기 같은 것들을 특유의 관조와 무미건조함으로 실제로 그것은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깨우쳐주고, 멀리서 보면 너무나도 이상한 것처럼 보이는 게 가까이서 보면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평범해 보이는 것 또한 느끼게 해 줬다. 결국 <대성당>의 메세지가 모든 작품을 관통한다고 본다. 직접 공감하고 느끼기 전에는 상대를 이해하기엔 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작가에게 놀아난 느낌이 아니라, 작가가 어떤 장치를 통해 작품을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려고 했는데, 그 장치를 내가 잘 받아들이지 못해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게 참 아쉽기도 하다. 고전에 대한 더 많은 숙련이 필요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