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대하는 태도에 옳고 그름이 있는가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난 어릴 적, 죽음을 단순히 몸의 변화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 난 죽음을 마음의 변화로 이해한다. 즉 사별을 견디어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 말이다. 허무주의자들은 죽음이 끝이라고 하고, 근본주의자들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상 죽음이란, 가족 또는 세 들었던 사람이 집이나 마을을 떠나는 것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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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에게는 연민과 추모의 눈길을 보낸다. 별다른 변수가 없는 이상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자에게 보내는 시선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족에게로 시선을 돌려보자. 우리는 유족에게도 동정과 연민의 감정을 보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갖는 이 마음들은 유족들에게 있어서는 완전히 독립된 것이다. 즉 그들이 어떻게 느끼는지와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그들을 생각하는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주변 사람들이 그들을 더 안타까워한다고 해서 가족이 죽은 슬픔이 더 배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럼 사자의 가족들은 어떤 감정을 느끼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이 책은 어머니가 죽고 그 시신을 어머니의 고향으로 매장하러 가는 가족의 여정을 통해 부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가족의 죽음을 맞이한 유족들의 실존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흡사 어머니의 죽음이 별로 큰일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결코 그런 모습들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아는, 우리가 바라는 정석적인 반응인 '있는 그대로의 슬픔'을 느끼는 인물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물이 여정에 부모님의 매장 외의 목적들이 있다.
윤리적인 관점으로 접근해 봤을 때, 어머니를 매장하러 가는 여정 속에 우리는 어떤 감정과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할까? 슬픔과 애도의 감정을 갖고 부모님을 안전히 묘까지 모셔다 드리는 목적만을 갖고 있어야 하는 걸까? 나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윤리적이지 않는 사람이 되는 걸까? 그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령 예를 들어 보자. 부모님을 화장하러 화장터에 가는 길이다. 당연히 유족은 슬프다. 하지만 가는 길에 있는 단풍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유족은 그 아름다운 단풍을 보고 기쁨을 느껴서도 안 되는 것인가? 또한 화장터 근처에 자기가 꼭 사고 싶어 했던 물건을 파는 매장이 있다. 그 물건을 사면 안 되는 것인가? 굳이 그때 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 할 말이 없지만, 그걸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없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는 너무나도 엄격하다. 마치 그 순간만큼은 슬픔과 애도의 감정을 제외한 모든 것을 배제하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이게 왠지 불편하다. 당연히 슬픔도 느끼지만 하루 종일 슬픔을 느껴야만 한다는 것이.
이 책은 그런 면에서 사람들이 바라는 유족의 인간상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만, 내 입장에서는 지극히 인간적인, 죽음 앞에서 지극히 실존적인 인간상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를 매장하러 가는 도중에 자신의 말을 잃어서 화난 아들, 낙태를 위해 약을 구하는 딸, 축음기를 사고 싶어 했던 아들, 틀니를 맞추려고 하는 남편. 다 윤리적으로 바라봤을 땐, 불효자식들에 나쁜 남편이다. 하지만, '어머니/아내의 죽음'이 없었더라도 이들은 이걸 바랐을 것이다. 기존에 존재했던 욕망을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서 완전히 억눌러야만 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안타깝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저마다 다르고, 우리는 죽음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에게 그 어떤 것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