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늘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사실 재앙이란 항상 있는 일이지만,
막상 들이닥치면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 어려운 법이다.
53p
오랑이라는 도시에 창궐한 페스트, 살상률 높은 이 전염병 앞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인간상의 연대기.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정의감에 불타올라 보건위생대를 조직해 이끄는 사람, 사람들을 끊임없이 치료해 주는 의사, 신앙 아래 전염병을 맞이하는 사람, 긴급보급물자를 팔며 부당이익을 취하는 자 등 정말 많은 인간상들이 페스트를 관통하는 동시에 인간사를 관통한다. 그런데 이게 과연 페스트라는 살인적인 전염병 앞에서만 나타나는 인간상일까?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문하고 싶다. 전염병 없는 시대에, 저런 인간상이 과연 없었는가? 평화로운 시대에도 남을 등쳐먹어 사기 치는 사람들은 득실대며, 신앙에 인생과 목숨을 바치는 자들이 있으며, 정의감과 의무감에 불타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사람들은 많다. 오히려 전염병이 없을 때 더 많이 나타나는 인간 군상이다. 나는 수많은 인간들이 상주하는 계곡에서, 페스트라는 뜰채에 걸러진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죽음이 다가온 시대에 기존에 부도덕한 일을 저지르던 사람들이 지레 겁먹어, 몇몇 남은 불한당들이 눈에 띄는 게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반대도 마찬가지로, 평소에 정의롭고 좋은 일을 하던 사람들도 죽음의 마수 앞에 주저하는 사이, 행동하는 그들이 주목받게 되는 것이다. 양극에 있는 이들은, 전염병이 없었던 상황보다 더한 취급을 받게 된다. 욕이든 칭찬이든. 이유는 하나다. 눈에 띄는 소수니까.
코로나 시대인 지금이랑 대입해봐도, 이 책은 전혀 위화감이 없다. 오히려 현재를 보고 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현실을 잘 반영했다. 마스크 가격 올려대며 부당이익 취하던 사람들, 정의감과 의무감에 불타 대구로 떠나는 의료인들, 신앙에 목숨을 바친 자들. 하지만 그들은 늘 있었다. 코로나가 창궐하지 않았던 시대에도, 그들은 불한당이었으며, 정의로운 의사였으며, 광신도, 사이비였다. 코로나 시대에 더 주목을 받았을 뿐.
시장에서 바가지 씌우는 아저씨, 아줌마나 작 중에 등장하는 코타르가 본질적으로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남의 등쳐먹어 부당이익을 취하는 부도덕한 인간임은 똑같다. 미쳐버린 코타르가 별난 게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 주변엔 항상 코타르 같은 사람들이 득실댄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주변엔 리외와 같은 의사, 정의의 화신 타루 같은 사람들도 있다. 이런 시대를 거슬러 고정적으로 존재해 온 인간상들은 바꿀 수 없다. 나에게 적합한 인간상을 가진 이들을 나의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인류는 역시 그래 왔고, 그래 갈 것이다.
결국 어떤 자연현상이 도래하든, 인간상은 바뀌지 않는다. 과거에 수많은 재난들을 겪으며 형성된 게 지금의 인류이자,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늘 이래 왔다. 전염병을 이겨내는 와중에 말썽이 생기고, 그로 인해 피해가 더욱 커진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전염병을 이겨내고 산전수전 다 겪은 우리의 모습은 미래로 계승될 것이다. 미래의 우리도 늘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