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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예고된 살인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by 책 읽는 호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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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사건을 막는 데 무언가를 할 수 있었지만 정작 그렇게 하지 않았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명예에 관한 사안은 그 드라마의 주인공들에게만 주어지는 신성한 전유물이라는 핑계를 대며 자위해 버렸다.


124p




이 책은 예고된 죽음 앞에서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처참히 죽는, 죽은 후의 신체조차 무참히 학살되는 나사르의 죽음 연대기다. 마르케스가 직접 본 실화 바탕이라는 게 더 충격적이다.



일단 살인의 목적 혹은 정말 죄가 있는지의 여부는 차치하고, 우리는 예고된 살인을 앞둔 채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이 누구를 죽인다고 몇 시간 동안 말하고 다닌 후, 그의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걸까? 살인의 타겟이 된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알려야 하는 게 인간적인 모습인 걸까? 글쎄, 왠지 쉽사리 그렇게 행동하지는 못할 거 같다. 그 마음의 기저에는, 그러다가 자신이 화를 당할 수도 있겠다는 공포가 있을 것이다. 이렇듯, 자신의 공포 때문에 말하지 못했다면 불쾌한 감정이 없겠지만, 다수의 등장인물들은 그게 아니다. '에이, 그럴 리 없어.' 혹은 하는 척이 전부다. 그 행위를 통해 상황을 회피한 채로 자신은 인간적인 의무를 다했다며 자위하는 거다. 이게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이라고 해도 참으로 역겹지 아니한가.



그다음 짚어볼 것은 살인의 목적에 대해서다. 죽은 나사르는 여동생의 처녀를 빼앗었다는 '의혹'을 받은 채로 오빠 둘에게 몇십 방에 이르는 칼침을 맞은 채로 죽는다. 그렇다. 가족의 '명예'를 위해서다. 일단 지금 보면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이 살인 동기는 정당하게 인정되어 죄를 받지 않는다. 그렇다면, 명예가 과연 살인의 동기가 되는가에 대해서 깊게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시대상을 반영해야 함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에도,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심지어 이 살인 동기는 이 책이 바탕으로 한 실화와 100% 일치하는 부분이다. 당시 여성이 처녀성을 잃어 신혼 첫날밤 신랑에게 쫓겨나는 건 과연 처녀성을 잃은 걸 숨기고 남편이 될 사람을 속이려고 한 여성의 잘못인가, 내쫓은 남성의 잘못인가, 그녀의 처녀성을 뺏은 남성의 잘못인가, 아니면 사회의 잘못인가. 전후 관계에 대한 정보를 제로로 만들어놓고 본다고 해도 사회의 잘못이 맞지 않겠는가. 결국, 명예라는 이름 하에 죽은 나사르는 사회와 개인 둘에게 죽임을 당한 셈이며, 나사르를 죽인 오빠 둘은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사회 속에 희생양이 아니겠는가. 당연히 살인은 정당화될 수 없지만, 그들을 단순 미친놈 취급하기엔, 고려할 요소가 상당 부분 있다고 본다.



나 스스로를 작품 속 인물에게 투영해 봤을 때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나사르가 자신의 처녀를 빼앗았다고 한 앙헬라 비까리오다.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에 대해서는 1%라도 '그럴 수 있겠구나'하는 마음이 드는 데도, 이 인물만은 그런 생각이 안 든다. 도대체 왜 나사르에게 화살을 돌린 걸까? 팩트는 없지만 정황상 정말 나사르는 그녀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데 말이다. 사실 이런 누명의 과정은 이렇게 뜬금없이 말도 안 되게 일어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만약 내가 그런 궁지에 몰렸다면, 머리에 떠오르는 인물 아무나 말해버렸을 수도 있다. 그런 케이스라면 고개를 살짝 끄덕일 수는 있다. 그런데 앙헬라는 27년이 지난 후까지도 똑같이 주장하니까 아이러니하다.




젊고 미래가 밝은 한 청년의 억울한 죽음을 보고 있자면, 인생이란 것도 허무하게 한 방에 가버릴 수 있는 너무나도 무방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생은 스스로 개척해나가야 하는 것이라며, 귀가 닳게 들어왔음에도, 타자 없이 우리는 존재할 수 없기에. 어디서든 사람은 사람의 사냥감이 되면 벗어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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