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어 보는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단테의 문학과 삶은 망명과 함께 활짝 피어났다.
망명은 오히려 축복이었다.
235p
신곡을 전부 읽진 못했지만, 지옥편과 연옥편을 읽은 지 몇 달은 지난 거 같다. 갈수록 지루할 수밖에 없는 지옥-연옥-천국의 상승 구조에 굴복해 천국편은 읽다 말았다. 책에 오롯이 집중할 수 없는 시기였던 걸로 기억하긴 하지만 어차피 다 핑계일 뿐이다. 내가 신곡을 완독하지 못한 사람임은 똑같다.
예전 신곡의 서평에도 썼던 적이 있던 것 같다. '단테의 배경을 잘 알고 읽었다면 더욱더 재밌게 읽지 않았을까?'하는 진부한 아쉬움 말이다. 단테의 배경을 장소와 함께 읽은 지금은 아이러니하게 약간의 안도감이 든다. 이 배경을 잘 알고 읽었어도 내 신곡 독서의 경험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해하려고 애써 읽느라 재미가 반감됐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단테가 지나간 자리를 책으로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음은 값진 경험이다.
망명을 떠나 신곡을 쓰게 된 것도, 그 신곡이 불후의 대작이 된 것도 실제 단테에게는 참 비극적인 축복이 아닌가 싶다. 인용구에서도 알 수 있듯, 단테에게 망명은 오히려 축복으로 불릴 만한 사건이다. 당시 본인에게는 크나큰 고통이자 시련이었겠지만 말이다. 그런 면에서 불행이 당사자에게 축복이 되는 아이러니함은 탐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여러 가지 측면으로 바라볼 수 있다. 시간적인 관점으로 단기적, 장기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고, 좌절의 극복을 통한 인간의 성숙 등 인간의 성장 측면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아주 쉽고 보편적인 예가 '고통 뒤에 오는 성장'이 아닐까 싶다. 나 역시 당시에는 엄청나게 큰 불행이었던 것이 지금은 불행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축복이자 기회처럼 나에게 다가왔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불행의 축복으로의 변환은 당사자의 '극복'이 필수적으로 동반된다. 여기서 말하는 '극복'이란 불행을 정말 떨쳐버리는 것이 아니라, 불행에 굴복하지 않는 태도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내 의도와 더 적합할 것 같다.
이러한 상반된 것들의 변환 과정은 필시 의미부여와 뗄 수 없고, 그렇다면 의미부여는 좌절에 굴복하지 않는 중요한 무기로써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이 의미부여가 내 인생을 앞으로 전개함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는 걸 깨닫고 있다. 어디서 이런 글을 본 기억이 있다. '내가 부여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무엇을 하든 내가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면, 그것은 나에게 의미가 생기고, 그렇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A의 눈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이겠지만, B에게는 정말 큰 좋은 의미가 있는 일이고, C에게는 나쁜 의미가 있는 일일 수 있는 것이다.
각기 다른 의미부여는 살아온 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받음은 부정할 수 없으나, 나는 의식적으로 긍정적 의미부여를 연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래왔기 때문이다. 마음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
단테의 망명이라는 비극이자 축복인 사건을 내 가치관을 입혀 해석해봤다. 단테의 행적을 살펴보며 그의 생애에 이입함으로써, 그의 작품들을 더 깊고 진하게 느낄 수 있게 하는 게 분명 책이 의도한 바였겠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그렇게 안 된 것 같다.
서평에 정석이 어딨겠느냐만, 나에겐 책을 읽은 후의 나를 기록하는 행위이기에, 만족스럽다. 나는 오늘도 이렇게 의미부여를 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