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압의 시대 속 예술가로서의 삶
자신의 운명을 피할 길은 없다. 그리고 자기 마음을 피할 길도 없다.
20p
솔직히 고백해야만 한다. 나는 이 책을 이해할 수 없다. 아니, 내가 어떻게 감히 '이해'를 하겠는가. 탄압과 강압의 시대에 살아본 적도 없고, 인류 역사상 가장 평화로울 수도 있는 시기에 살고 있는 주제에. 가까운 시기였던 운동권조차 나는 겪어보지도 않았다. 그렇다. 난 이 책 앞에서 함부로 '이해'라는 감정을 가져서는 안 됐으며, 하위 개념인 '공감'조차 느껴서는 안 됐다.
저항하는 자와 굴복하는 자. 우리는 이 둘을 명백히 양극단에 서 있는 존재들로 인식한다. 체제에 저항하며 뜻을 펼치는 자에게 우리는 '용기'의 칭호를 붙이고 받드는 반면, 체제에 순응하며 탄압받지 않는 삶을 선택한 자에게 우리는 '겁쟁이'의 칭호를 붙이고 깎아내린다.
'당신이라면 굴복하지 않았겠습니까?' 같은 진부한 질문을 되풀이할 생각은 없다. 책 속의 말을 그저 전달하고 싶다.
겁쟁이가 되려면 불굴의 의지와 인내, 변화에 대한 거부가 필요했다. 이런 것들은 어떤 면에서는 일종의 용기이기도 했다.
행동만이 용기는 아니다. 감내하는 것 역시 용기다. 어떻게 보면 행동하지 않는 것이 더 대단한 용기일 수도 있다. 행동한 뒤의 모습을 과감하게 져버리는 행위니까. 이런 측면에서 보면 나에겐 행동하는 것보다 행동하지 않는 것이 더 용기가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사상 역시 하나의 고정관념인 것 같다. 특히나 한국에서는 더 그런 경향이 짙어 보인다. 한국에서 저항하고 행동하는 자들은 '독립운동가'로 대표되고, 순응하고 굴복한 자들은 '친일파'로 대표되기 때문이다. 물론 친일파는 행동하지 않는 것 이상으로 개인의 이득을 취하는 파렴치한이 틀림이 없다. 특수 상황에서의 순응은 다르게 바라봐야만 한다.
내가 강압의 환경 속에서 사는 경험을 한다면, 분명히 난 이 책을 지금과 완전히 다르게 읽게 될 것만 같다. 그때 나는 쇼스타코비치에게 동정을 표할 것인가, 아니면 경멸할 것인가. 가늠이 안 간다.
많은 코멘트를 남길 수 없는 책이다. 분명히. 그리고 남기고 싶지도 않다. 억지로 서평을 짜낸들 쓰지 않은 것만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