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필립 로스 『죽어가는 짐승』

죽음에 이르는 강제적이면서도 순종적인 길, 늙음

by 책 읽는 호랭이
KakaoTalk_20200816_104501515.jpg




아직 늙지 않은 사람들에게 늙는다는 것은 과거에 존재했다는 뜻이야.


늙는다는 것은 과거에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넘어서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해.


과거에 존재한 것이 생생하게 살아 있어.


너는 여전히 존재하고, 이미 존재했다는 것, 지나갔다는 것에 시달리는 만큼이나 네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 너를 꽉 채우고 있다는 것에 시달려.


노년이란 걸 이런 식으로 생각해봐. 생명이 위기에 처하는 것이 그냥 일상적인 상황이 되어버리는 거라고 말이야.


곧 마주치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걸 피할 도리가 없어.


51p




늙음에는 상응하는 반의어가 없다. 직관적으로 우리는 '젊음'을 떠올릴 수 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젊음이 과연 늙음의 반대말이 될 수 있는지 의문을 던지게 된다. 젊은 순간들조차 늙어가는, 즉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포착되는 한순간들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젊음이 늙음의 반의어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늙음은 그 자체로 절대적이고 거부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 어느 누구든 늙음을 피할 수 없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의학 기술로 인해 수명을 늘리고, 철저한 관리를 통해 오래 사는 것은 늙음을 조금이나마 피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유감스럽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오래 산다'라는 의미는 늙음이 거쳐갈 시간이 많아졌다는 의미일 뿐이지, 그것은 결코 늙음을 피해 갈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이렇듯, 죽음에 이르는 가장 일반적이고 평화로운, 어쩌면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은 노화일 것이다. 주인공은 일흔 즈음 매 순간이 죽음을 향한 발걸음이라고 느끼고, 자신과는 상반되는 젊은 사람들, 생명력이 넘쳐흐르는 사람들의 육체를 마음껏 탐하며 조금이라도 그 순간의 느낌들을 저지하고자 한다. 거역할 수 없는 죽음의 행진 앞에서 주인공은 젊은이들과의 육체적 교감, 섹스를 통해 끝없이 저항하려 한다.



독백의 형식이라 주인공의 늙음을 향한 울부짖음만이 책 속에서 죽음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인 것처럼 느꼈지만, 아이러니하게 늙음이라는 것은 죽음으로 향하는 '하나의 길'이었을 뿐임을 독백을 통해 깨닫게 된다. 늙음을 절대 죽음을 품을 수 없다. 하지만 죽음은 늙음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삶을 품고 있다.



늙음이 죽음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가는 것과 같다면,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는 번지점프와도 같고, 치명적인 암에 걸리는 것은 고속 열차를 타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이렇게 죽음은 만물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다.




내 나이 26살, 명백히 늙어가고 있다. 아직은 죽음을 향해 한 발짝씩 다가가고 있다. 그 속도를 최대한 늦추고자 운동도 하고, 몸 관리도 하고 있다. 그래도 나는 죽음을 향해 걷고 있다. 내 삶의 끝이 죽음인 걸 알면서도, 어쩐지 회의감이 느껴지진 않는다. 내일 죽어도 스스로만큼은 여한이 없을 정도로 행복함을 느끼면서 살고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나는 대단히 큰 야망과 행복을 갈망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지금 죽어도 그것 나름대로 나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를 온전히 품을 수 있는 행복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내가 죽으면 울어줄 사람들 역시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거면 되지 않을까? 엄청난 부자가 되고 싶고, 무지막지하게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긴 하지만, 인생의 목표는 아니다. 내 삶을 살아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성취할 것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매 순간들이 행복하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나는 늙어갈수록 더 행복할 것만 같다. 절대적인 관점에서의 늙음과 나에게 있어서의 행복은 시간에 비례해서 더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의 늙어감이 기대된다. 내일의 나는, 1년 뒤의 나는, 10년 뒤의 나는, 30년 뒤의 나는, 도대체 어떤 행복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을까? 그때는 어떻게 행복을 느끼고 있을까? 누구로 인해 행복을 느끼고 있을까? 분명히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 텐데.




keyword
작가의 이전글마이클 샌델 『완벽에 대한 반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