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턱 《홉스》
평화로 가는 길, 자유와 법
그는 관용을 찬양했지만, 한편으로는 지적인 문제에서 전권을 지닌 절대적 주권자를 옹호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읽은 후, 누가 정했는지는 모르지만 자유론 을 읽은 뒤에는 사회계약론을 읽어야 한다는 보편적 절차에 따라, 사회계약론의 초석을 다진 토머스 홉스의 생애, 철학 등을 다룬 『홉스』를 읽게 되었다. 사실, 홉스라는 인물을 모르고 있었다. 철학가가 되고 싶다는 인생의 목표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철학에 대한 이놈의 무지를 얼른 해치워버리고 싶다.
평화를 위해 절대적 주권자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나는 『군주론』을 통한 마키아벨리의 철학과 홉스의 철학을 비교하며 읽기 시작했다. 결과적인 의미의 차이도 존재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시작점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홉스는 온전히 '평화'를 원했고, 평화를 위해 불확실성이 만연한 개인의 생각, 지식, 시선들에 '일종의 통제?'가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그는 주권자를 불러냈다. 마키아벨리는 국가적 관점에서의 효율을 위해서 절대적 군주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고. (내 지식 선에서) 이런 면에서 보면, 홉스가 조금 더 온건하고 바람직한 방향의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홉스는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갈등 (그 끝은 전쟁)을 예방하기 위해서 법의 개념을 이용하며, '자유'와 '법'을 이야기한다. 자기보존을 위해 개인은 자유로워야 하며, 이는 어떤 행위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의 개념이다. 이를 '자연권'이라 칭한다. 하지만 이 권리는 철저히 '법' 아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자연법'이라 칭한다. 이런 점에서, 마키아벨리의 철학과 태도적 차이가 느껴진다. 마키아벨리는 국민들이 무지몽매하기 때문에 절대 군주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던 반면, 홉스는 국민들의 혼란을 막기 위한 하나의 체계가 필요하다는 입장처럼 느껴진다. 결과적으로, 홉스는 절대 군주를 원한 게 아니라 불확실성으로 인한 갈등을 방지하기 위한 하나의 법 체계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군주론』과 절대적 차이가 존재한다고 본다.
밀의 『자유론』과 연결해 홉스의 철학을 생각해 보면, 결과적으로 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밀이 어떠한 체계 아래에서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개인은 한없이 자유로워야 한다며 '개인'에게 중심을 두어 철학을 전개시켰다면, 홉스는 개인이 자유를 추구하는 와중에 갈등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없기에 주권자가 필요하며, 자연법 아래에서 자연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함을 이야기한다. 이 둘은 개인의 자유를 소중히 생각했다. 단지 밀은 '개인'에 초점을 맞추었을 뿐이고 홉스는 '체계'에 초점을 맞추었을 뿐이다.
철학에 '맞고 틀리다'라는 잣대를 들이댈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철학자들이 구축한 그들의 철학을 접하다 보면 뭔가 '틀렸다'라는 느낌은 들었던 적이 없는 것 같다. 과격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었어도, 이게 틀린 방법이구나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만큼 탄탄하게 논리가 구축되어 있어서 그런지, 이런 점들이 철학에 빠져들게 되는 주된 원인이다. 당대 손에 꼽히는 지식인들이 일생을 바쳐 구축해 온 결과물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한다. 그러면서도, 나도 그런 나만의 철학을 구축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 끓어오르기도 하고.
아직 얼마 읽지도 않았지만 철학서들은 읽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음은 물론이요, '내 것이 됐다'라는 느낌도 잘 들지 않는다. 내용의 흡수라는 측면에서 철학서들은 완독의 묘미가 떨어지는 책들이지만, 어려운 책들을 읽어나가고 당대 초엘리트 지식인들의 사상을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완독에 의미가 유달리 뛰어난 책들이다. 그래서 나는 어려워도 철학서들을 읽어나가려 한다. 나만의 철학을 구축하고 싶으니까. 철학가가 되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