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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블랑쇼 『기다림 망각』

살해하는 언어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다

by 책 읽는 호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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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린다는 것, 무엇을 기다려야만 했는가? 만약 그가 그렇게 묻는다면, 그녀는 놀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에게는 기다린다는 것만으로 이미 충분히 말이 되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어떤 것을 기다리게 되자마자, 보다 덜 기다리게 되었다.


22p




나는 사유의 향연 앞에서 큰 벽을 느끼고, 타의에 의해 모든 문장의 단어 하나하나를 허투루 넘기지 못한 채로 천천히 읽어나갔다. 어떤 서사 없이 이름도 모를 남녀 두 명이 호텔방에서 나누는 이야기 - 그것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 로 꽉 채워진 이 독서가 어쩌면 나는 고통스러웠을지 모른다. 범접할 수 없는 사유 앞에서 나는 어린 아이가 돼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이따금씩 '언어의 한계'에 대해서 생각하곤 했다. 우리 앞에 현전하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언어'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그것들이 '언어'라는 그릇 위에서만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이런 생각들을 통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언어의 범위'가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세상의 범위'라고 나름 결론을 내렸다. 이런 내 사유에는 어떠한 저항도 없었다. 그저, 우리는 언어를 사용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 그 안에서 느끼고 표현하고 공유하겠구나라는 데서 사유는 멈췄다.



저자는 내 사유를 가뿐히 뛰어넘어, 마치 나로 하여금 의문 앞에서 어떠한 행동을 하지도 않은 사람처럼 느끼게 하며, 거침없이 언어의 한계에 저항한다. 하지만, 언어를 사용해야만 한다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순 없다. 저항만 할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의미 없다고는 절대 이야기할 수 없다. 아니, 반역할 수 없는 무형의 어떤 것에 강한 반기를 들어 저항한다는 것 자체가 인간이 할 수 있는 특정 관점에서 사유의 정점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저자 모리스 블랑쇼의 책은 지극히 철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데카르트의 철학에 반기를 드는 듯한 사유도 있었다. 유명론과 실재론이 충돌하는 듯한 모습? 애초에, 저자의 집필 의도 자체가 철학적 사유를 소설의 형식 (그렇다고 전형적인 소설의 형태도 아니다) 을 빌려 쓴 것 같은 느낌이기에, 독서의 접근 자체를 소설이 아닌 철학서로 해야 한다.



거시적 측면에서 보면 '언어의 한계'라고 명명할 수 있겠고, 미시적 측면에서 보면 나는 '목적어에 대한 반항'으로 명명할 수 있다고 본다. 흔히 동사로 일컬어지는 인간들의 '행위'는 늘상 목적어에 '묶여'있다. 책 제목인 기다림과 망각을 예시로 들어보자. '기다림'과 '~을 기다리다'의 차이를 곰곰이 한 번 생각해 보면 명확히 구분할 수 없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다. '기다림'이라는 어떤 행위는 언어에 제약받고 있으며, 그 본의가 언어에 의해 흐릿해지고, 언어에 의해 (시간적으로) 특정 지어지게 된다.



저자는 이게 의문스럽고 참을 수 없었던 게 아닐까 한다. 태어남에서 죽음까지 가는 인간의 모든 흐름이 언어로 인해 특정 지어지고, 한순간만으로 남겨지게 되는 것이 말이다. 그래서 『기다림 망각』이라는 작품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특정 지어놓지 않고, 모든 것들을 현전하게 만드는, 보편적 글의 기준으로 하여금 다소 난해한 문장의 향연을 펼친 게 아닐까.



철학적 사유 능력이 올라갈수록, 모리스 블랑쇼의 작품을 소화할 수 있는 폭이 커질 수 있을 것 같다. 책은 참 대단한 게, 성장했다 싶으면 햇병아리임을 자각하게 만드는 대단한 벽들이 등장한다. 위대한 사람들의 위대한 사유 앞에, 한없이 겸손해진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사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함에 좌절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인 것. 적어도 몇십 년 이상을 철학적 사유에 바친 그들을 내가 어떻게 따라가겠는가. 그럼에도 나는 읽을 수밖에 없다. 그들의 사유가 나의 사유를 크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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