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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블랑쇼 『죽음의 선고』

죽음의 선고, 진정한 죽어감의 시작

by 책 읽는 호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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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죽어 가고 있어요"라는 말은 그야말로 순간포착해야 할 사실이었다. 그녀는 죽어 가고 있었고, 그녀는 거의 죽어 있었다. 기다림은 그 순간 시작되었던 것이 아니다. 그 순간 기다림은 끝을 맺었던 것이다.


32p




언어에 대한 격렬하지만 조용한 저항, 며칠 전 읽었던 『기다림 망각』과 같은 감상이 내 머릿속을 지배한다. '죽음'이라는 단어, 우리들이 흔히 사용하고 정의되어지는 '죽음'에 대한 언어적 재단에 대한 저항과 죽음이 선고된 순간부터 시작되는 진정한 '죽어감'



서평조차 쉽게 써 나갈 수가 없다. 가슴이 탁 막힌 느낌. 지고한 저자의 사상 앞에서 내가 써 나갈 언어들은 한낱 껍데기에 불과할 뿐이며, 블랑쇼의 책을 언어로 정리하고 있다는 것에 크나큰 모순을 느끼게 된다. 책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책이 아닌, 소설이지만 소설이 아닌, 이야기지만 이야기가 아닌, 죽음에 대한 것이지만 죽음에 대한 것이 아닌 이것을 나는 도대체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 걸까.



늘 그렇듯, 단순한 느낌의 나열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내 얕은 세계에서 나오는 소수의 단어들로만 그의 사상을 받아들임을 토해낼 수밖에 없다는 게 아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필연적이지만 너무나도 멀게 느껴지는 이질적인 보편의 것 (낯설고 두려운 것이지만 사실은 억압된 낯익음). 필연이 가슴에 와닿게 되는 순간은 바로 '선고'가 시작된 시점부터다. '죽음의 선고'가 이루어진 시점부터 모든 희망은 불행이 되고, 끝이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들이 그 끝을 드러낸다. 아니, 특정 시점에 모든 것들이 끊기기 때문에 드러내어진다. '선고' 이후에는 부활조차 고통의 연속이다. '1차 죽음' 후 '부활'한 J가 병마에 지배당하며 고통에 허덕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죽어감'은 부활 이후에도 진행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죽음은 '하나의 순간'이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저자가 말하듯, 죽음은 '흩어짐'일뿐이다. 정확히 말하면, 죽음은 없고 '죽어감'만 있다. 죽어가는 모든 순간들을 우리는 죽음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죽어가는 모든 순간들은 단순히 죽음으로만 불리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단순한 하나의 단어로만 정의 내리기엔, '죽어감'은 우주만큼 넓은 미지의 무엇을 담고 있다.



무력해지는 글쓰기다. 이 책에 대한 감상을 더 이상 이 글 위에 내려놓을 수 없다. 죽음이 실제로 와닿을 만한 나이가 된다면, 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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