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없어진 순간'에 대한 극한의 고찰
다음 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 삶의 규칙과 절대적인 모순을 이루는 이 사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엄청난, 그리고 이런 상황이라면 충분히 이해해 줄 만한 불안을 일으켰다. 총 사십 권이나 되는 세계사 책을 훑어보아도 그런 현상이 있었다는 서술은커녕, 단 한 건의 사례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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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하고 있지만 인식하고 있는 상태로는 절대로 삶을 유지할 수 없는 죽음. 삶의 유한함을 알고 있지만 무한한 것처럼 살아가는 인간에게 던지는 물음. 이런 점에서 '죽음의 중지'라는 살아가면서 죽어가는 인간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자, 무한한 것처럼 살아가는 유한한 인간의 명확한 한계점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점은, 일단 실제로 죽음이 중지한다면 (있을 수가 없지만) 발생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일들을 서사화했기 때문이다. 작품 집필의 기간 중 그 상황에 대한 고민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을 것 같다. 인구 문제, 병원의 침상 문제, 보험 문제 등 우리의 일상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에 균열이 가해지면서 요동치기 시작한다.
또 하나는, 인간이 인식하는 '죽음'이란 존재(?), 개념에 철퇴를 가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죽음을 절대 벗어날 수 없다. 이 말은 죽지 않는다는 말을 넘어서는 그 무언가다. 가령, 우리가 '죽음의 중지'가 도래한 순간에 살고 있다고 해서 죽음에 그 어떠한 신경도 쓰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이 질문에 이어서 떠오르는 묘한 의문이 생긴다. 우리는 '죽음의 중지'가 도래한 순간에 살고 있지 않으면서도 죽음에 그 어떠한 신경도 쓰지 않고 살아가는 것만 같다. 살기 위한 망각인가, 망각으로 인한 삶의 지속 가능인가.
'죽음' 조차도 인간의 죽음을 제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참 신박한 설정이었다고 본다. 저자는 죽음을 선고하는 어떤 존재를 '여자의 해골 모습'으로 의인화(?)시켜, 죽어가는 인간의 반대쪽에 시선을 둔다. 죽음을 선고해도 도저히 죽지 않는 한 첼리스트에 묘한 집착으로 시작해 결국 사랑의 감정까지 느껴 죽음을 선고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한 존재가 그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이는, 죽음은 절대적인 독립 형태에 놓여 있음을 시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내가 가진 죽음의 사유의 한계점을 넘어선 사유의 전개라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감이 잘 안 온다. 저자가 죽음을 어떻게 정의하고 이야기를 전개한 건지, 죽음을 무엇으로 정의라도 하기는 한 건지. 단 하나 분명한 것은, 주제 사라마구의 죽음을 향한 상상은 단언컨대 삶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행위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결국 인간에게 죽음은 살아감과 죽어감에 대한 것이 분명한데, 잘 모르겠다. 어째서 인간이 유한함을 그토록 외면하고 무한한 것처럼 살아갈 수 있는 건지. 그 기재가 무엇인지. 삶의 마지막 순간을 인식하는 것이 삶을 지속하는 것과 정반대에 위치한 것인지.
나 정도의 사유의 깊이로 죽음을 파악하는 건 어림도 없는 소리겠지만, 최근 죽음에 관한 책을 꽤 많이 탐독하고 있는데 어려운 수준의 문제가 아닌 듯하다. 왜 중세 철학자들이 죽음을 신에게 떠맡겼는지 알 것만 같기도 하다. 도저히 신이 아니면 풀 수 없으니까 신의 법칙으로 설명한 게 아닐까.
죽음에 대한 나름의 철학이 생길 때까지 정진해야만 한다. 죽음을 외면한 채로 살아가고 싶지 않다. 죽음에 대한 확실한 견해, 그것을 통한 삶의 의지를 불태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