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 사랑이 갖는 의미의 확장, 인간 대 인간의 사랑
네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면
남들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네가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남들도 심각하게 생각하고.
모든 일이 그래. 항상 네가 먼저야.
작중 박동훈 (이선균)의 말
어디부터 어떻게 말해야 지금 내 가슴속에 울리고 있는 이 감정들을 글로 옮겨낼 수 있을까. 그래, 사랑이라는 것과 삶이라는 것으로 내 모든 울림을 응집시켜야겠다. 연기자들의 연기에 대해서는 어떠한 코멘트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할 줄도 모르고. 오로지 이 드라마로부터 나에게 닿은 메세지만을 써 내려갈 것이다.
이 드라마가 '사랑을 주제로 하는 드라마일까?'라는 질문에 나는 한치의 고민도 없이 '그렇다'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남녀 간의 사랑을 주제로 하는 드라마일까?'라는 질문에는 한치의 고민도 없이 '아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이건 연애물이 아니다. 이성 간의 사랑을 아우르는 '인간 사이의 사랑'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랑 사이의 차이를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좋아함'과 '사랑함'의 정의를 명확히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는 가족을 좋아하고, 친구를 좋아한다, 주변의 소중한 사람은 다 좋아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소중한 사람은 모두 사랑하고 있다. 좋아함의 주체와 객체가 성별이 달라진다고 좋아함이 그 좋아함이 아니게 되는 걸까? 사랑의 주체와 객체가 성별이 달라진다고 그 사랑함이 아니게 되는 걸까? 단지, 좋아함과 사랑함은 연인이라는 관계 속에서 의미가 더 좁아질 뿐인 거다.
그래서, 『나의 아저씨』는 진정한 사랑 이야기다. 인간과 인간의 사랑 이야기. 내가 느끼고 있는 '그 사랑'. 그래서 더 나에게 와닿았다. 내 주변 소중한 사람들을 향한 내 사랑의 모습과 박동훈과 이지안의 서로를 향한 사랑이 너무나도 비슷해서. 아니, 똑같아서.
또한, 『나의 아저씨』는 삶에 대한 이야기다. 저마다 깊은 상처가 패인 삶을 치유해나가는 그런 이야기다. 끔찍한 지옥 속에서 애써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 미소의 크기가 더 커져 지옥이 마침내 천국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
사람들은 저마다 걸어온 길 속에 끔찍한 상처들이 있다. 순간의 아픔이 싫어서 약도 바르지 않고 전혀 손대지 않는 사람도 있고, 순간의 고통을 마주하며 상처를 치료하는 사람도 있다. 회피와 마주함이다. 하지만, 상처가 있지만 '상처 따윈 없다'라고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각인시켜 순간순간의 자신에게서 '소멸시켜'버리는 사람도 있다. 그게 박동훈 (이선균)이다. 그렇게 꾹꾹 상처를 소멸하듯 감내하는 사람은 마침내 상처를 극복하게 될 때는 두 가지 형태로 이루어진다. 같은 부류의 사람을 만나 서로의 숨겨진 상처를 보듬어줌으로써 극복하는 형태와 소멸하듯 감내한 상처가 진짜로 소멸되면서 극복하는 형태다. 박동훈과 이지안 (이지은)은 전자다. 전자의 관계는 사랑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사랑과 삶을 모두 담고 있는 이야기이다.
나는 후자다. 소멸하듯 감내한 상처로부터 나는 독립한다. 내 안의 상처는 결국 절멸한다. 이렇게 되기 전에 박동훈과 이지안의 관계처럼, 누군가가 내게 나타났다면 후자가 아닌 전자로써 상처가 소멸됐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난 후자가 됐다.
작품 내내 견지되는 어른과 아이의 대응. 어린애가 어찌 이렇게 다쳤을까 하며 상처투성이 아이를 향한 어른의 안쓰러운 마음. 어른인데도 이렇게 상처가 많구나 하며 상처투성이 어른을 보는 아이의 안쓰러운 마음. 같으면서도 다르다. 그들의 감정은 같다. 서로를 불쌍해하며, 감싸주고 싶어 한다.
나도 누군가에겐 어른일 것이고, 누군가에겐 아이일 것이다. 확실한 건, 박동훈같이 상처투성이 아이를 보듬어줄 수 있는 어른이면 한다는 것과, 이지안처럼 온전히 자신을 감싸주는 어른에게 힘껏 투신할 수 있는 아이이면 한다는 것이다.
인간 대 인간의 사랑, 상처투성이 삶의 치유, 어른과 아이. 흠잡을 데 없는 서사와 연기력을 품은 작품이지만, 온전히 나에게는 메세지만 남는다. 강렬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