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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포크너 『소리와 분노』

빠져들지 않고는 절대 나아갈 수 없는 마성의 이야기

by 책 읽는 호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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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은 자기 혈육을 위해서라면 희생도 불사한다고 믿으면서 자랐는데.


345p




몰락하는 가문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모든 게 어그러진 가족의 이야기이면서, 모든 걸 짊어져야 하는 가장의 이야기이면서, 금단의 사랑을 나누는 커플의 이야기이면서, 부모 밑에서 자라지 못하는 질풍노도의 청소년의 이야기.



이게 바로 소설이구나, 이게 바로 이야기구나. 예전에는 책에 일방적으로 끌려다니는 내 모습이 싫기도 하고, 그 책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이 있었다. 근래에는, 이런 책들을 만나면 꽤 희열감이 느껴지곤 한다. 내 능력을 아늑히 웃도는 그런 책을 만났구나 하면서 말이다. 그렇다. 『소리와 분노』는 내 독서 역량을 웃도는 책임과 동시에, 향상시켜주는 책이다.



네 편의 섹션 중 화자가 지정된 세 편과 전지적 작가 시점인 한 편을 통해, 우리는 한 가문과 가정, 인물들을 다각도로 바라볼 수 있다. 복잡하기보다는 잘 정리되어 있는데 이해에 시간이 다소 소요되기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운 느낌이다.



내가 캐치한 주된 화두는 3살 지능을 가진 33살의 백치 '벤지'다. 가족이라는 이름 하에, 지적 장애가 있음에도 계속 집에서 보살핌을 받는 벤지. 정성스레 벤지를 챙겨주는 가족이 있는 한편, 얼른 보호소 내지는 병동에 보내버리고 싶은 가족도 있다. 가족이라는 이름 하에, 아니, 소중한 사람이라는 관계 하에서 나라면 가상의 '벤지'에게 어느 정도의 사랑을 베풀 수 있을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단순히 '가족 중 한 명이 장애인이라면 어떻게 할래?'와 같은 단편적인 질문이 아니다.



가문의 명성과 가족이기 때문에 보살핌을 받는 듯한 벤지의 모습을 보며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가문의 의미가 사라지다시피 하고, 가족의 의미가 (예전과는 다르게) 퇴색되어 가는 현시대에 이 이야기 속 벤지를 보살피는 가정은 어떤 의미가 있고, 그들의 행동이 얼마나 힘든 결정일지 생각해 보게 된다. 적어도, 과거에 비해 그런 결정을 내릴 가능성은 지극히 낮아졌고, 결정 후의 번복의 가능성은 매우 높아졌다는 점은 명백하다.



또한, 결코 화자로 등장하지 않지만 모든 섹션에 주인공처럼 등장하는 '캐디'가 이 복잡한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이 아닐까 생각한다. 첫 번째 섹션의 화자인 벤지에게는 한없이 착하고 애정이 많은 누나이면서, 두 번째 섹션의 화자인 퀜틴에게는 애정의 대상인 누이이면서, 세 번째 섹션의 화자인 제이슨에게는 버림받은 파탄 난 인생의 누나다. 독자들은 각각의 화자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캐디를 접하면서 그녀에 대한 이미지를 구축한다.



어느 이미지가 맞는지는 알 수 없다. 오로지 독자의 판단에 맡겨져 있다. 독자마다 쌓인 그녀의 이미지에 따라서, 이야기 속 인물들은 천사이기도 하면서 악마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한 사람의 손에서 쓰인 '하나의 이야기'는 셀 수 없는 사람의 눈에 읽히면서 '셀 수 없는 이야기'로 확장한다. 윌리엄 포크너가 위대하다고 칭송받는 이유 중 하나가 이런 문학의 무한한 확장성을 직접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부족한 내 필력으로는, 무한히 확장하는 이 이야기를 담기 벅차다. 소설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특히나 세계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강력히 이 책을 추천하는 바이다. 의식의 흐름 기법에 고통스럽겠지만, 그 끝에는 분명히 스스로 쌓아올린, 본인만의 감상이 담긴 '당신만의 『소리와 분노』'가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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