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문학 속 탐정들의 조상, 필립 말로의 세계 속으로!
이미 죽어버린 마당에 어디 묻힌들 무슨 상관일까? 더러운 물웅덩이면 어떻고 높은 언덕의 대리석 탑이면 또 어떠랴? 죽은 사람은 깊은 잠(Big Sleep)에 빠졌으니 어느 쪽이든 아랑곳하지 않는다. 기름이든 물이든 바람이나 공기와 다를 바 없다. 얼마나 부당하게 죽었건 어디에 버려졌건 아랑곳하지 않고 깊은 잠을 잘 뿐이다.
278p
레이먼드 챈들러의 첫 장편소설이자, 그 유명한 필립 말로 시리즈의 첫 작품! 후대의 추리소설은 물론 문학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전형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사설 탐정의 모습. 중절모에 트렌치 코트, 줄담배에 술을 즐기는 시니컬한 사람. 우리의 인상에 강하게 남아 있는 이 사설 탐정의 모습은 챈들러의 필립 말로로부터 영향 받은 수많은 작품 속 탐정들로부터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읽으면서도 뭔가 비슷한 캐릭터를 만난 적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었는데, 하라 료의 탐정 사와자키가 필립 말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한다.
이 책은 줄거리를 요약하기가 굉장히 까다로운 그런 책이다. 하나인 듯 아닌 듯한 에피소드들이 묘하게 독자를 이끌어가는 것 같다. 엄청난 개연성으로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애매모호한 개연성으로 독자의 감탄을 자아낸다. 뻥 뚫린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보단, 여기저기 샛길을 뚫고 나가는 느낌이랄까.
말로 중심적인 서사임에도 불구하고 등장하는 인물들이 묘하게 뚜렷하고 매력이 있다. 각각의 캐릭터성을 보여주기에 굉장히 분량이 적었던 것으로 체감하는데, 읽고 난 후 곱씹어 보니 그들의 잔상이 은은하게 남아 있다. 이어지는 시리즈에도 나왔으면 하는 기대를 남기면서.
80년이 지난 책이어서 어떻게 보면 당연하게 느껴지는 고전적 느낌과 동시에, 알게 모르게 느껴지는 현대적인 느낌이 아리송하다. 지나치게 시니컬한 말로의 캐릭터성이 현대와 잘 부합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딱히 오래된 작품이라는 느낌이 들진 않았다. 금주령이나 동성애 금지법 같은 사회적 배경에서만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었지, 캐릭터성이나 스토리 전개에서는 깔끔하게 고전과 현대를 조화롭게 표현했다고 본다.
오랜만에 읽는 이런 느와르적 분위기의 소설 너무 좋다. 추리소설이지만, 독자로 하여금 범인을 찾거나 하는 형태가 아닌, 말로의 행적을 그대로 따라가 사건이 해결되는 것을 바라보는 형태 또한 머리가 복잡하지 않은 독서에 참 적절했다. 말로가 도슨트고, 나는 관람객인 것처럼. 나는 말로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된다. 일에 치여 머릿속이 포화인 요즘, 나에게는 말로 같은 주인공이 멋지게 이끄는 소설이 참으로 단비 같다.
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으로 필립 말로 시리즈가 빅 슬립밖에 없는 걸까. 있으면 시리즈 순서별로 쭉쭉 사서 읽을 텐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팀에서 작업 중이길 내심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