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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리밀 Nov 04. 2017

가벼움과 진중함 사이의 환승역

스텔라장 - 환승입니다

 소위 "페북 시인"들의 글을 정말 싫어한다. 단순히 SNS에 시를 올리는 사람이 싫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내가 싫어하는 글이란 깊이가 없는 글이다. 이게 시인지 인터넷 유행어의 버무림인지, 이게 시가 맞긴 한건지, 아니면 감성적인 척 인터넷 유행어의 시류를 탄 줄글을 싹둑 오려서 붙여놓은 건지. 그런 글조각들에는 무게가 없고, 진심이 없다. 모든 작품에는 무게가 있었으면 좋겠고, 진심이 담겨 있었으면 좋겠다. 글에 담긴 무게, 깊이, 진심, 그런 것들이 단순한 문자의 배열들로부터, 무언가를 담고 있는 작품을 차별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종이 위에 남긴 흑연 자국, 몇십 바이트짜리 텍스트, 그런 것들이 생명력을 갖게 하는 것이 바로 "글에 담긴 진심"이라 생각한다.

 그런 글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딱딱한 글은 썩 읽히지 않는다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내용의 깊이지, 형식의 깊이가 아니다. 복잡하고 오묘하고 깊은 것을 단순하게 표현하는 것이 정말 좋은 작품의 형태에 가깝다. 물론 그런 글을 쓰기는 너무나도 어렵다.

 어렵게 쓴 글은 내용과 상관없이, 정말 좋은 글이라는 평가를 받기는 힘들 것이다. 읽는 내내 숨이 턱턱 막히는 글, 독자로 하여금 글을 읽는 것인지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인지 헷갈리게 하는 글. 그런 철옹성같은 글들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온 것이 "페북 시인"의 글일까? 그렇게 쉽게 쓰인 글들은 형식의 장벽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리고 그 낮은 장벽만큼이나, 글의 속 역시 텅 비어있다. 하지만 그런 글을 좋아하고 소비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다. 감성의 역치의 차이일까. 아무튼 그런 글들을 보면 진저리부터 나고, 읽고 싶지도 않고, 싫은 감정뿐이다.


 그리고 그런 "페북 시인"의 글을 읽을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이, 스텔라장이라는 뮤지션을 내가 처음 봤을 때 느낀 감정이다. 친한 후배가 정말 좋아하는 가수라고 하길래, 추천할만한 곡이 뭐가 있냐고 물었고, 그 후배는 "월급은 통장을 스칠 뿐"과 "환승입니다"를 추천해주었다. 위에서는 가벼운 글에 대한 싫음을 표현했는데, 음악에 있어서도 비슷하다. 페북 시인들의 얕은 글처럼, 얕은 음악들이 있다. 쉽게 쓴 글들이 정말 깊은 생각을 하고 적은 산문, 소설, 시 등을 구석으로 밀어내는 것처럼, 약간 얼빠진듯한 컨셉의 곡들이 정말 실력있는 밴드나 정말 깊은 생각을 담은 싱어송라이터들의 음악을 음지로 밀어내며 대중에게 다가가는것을 보면 정말 안타까워서, 그래서 그런 가벼운 글이나 음악들을 싫어하게 되었다. 무슨 제목이 "월급은 통장을 스칠 뿐"이지? "환승입니다"는 바람핀 애인에 대한 곡이라는데, 별로 깊이는 없어 보이네. 제목을 듣고 처음 한 생각이다. 얼굴은 또 예쁘장했다. 전에는 괜찮은 음악을 추천해주던 후배가 콘서트까지 쫓아다닐 정도로 좋아하는 가수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이 친구도 이런 얕은 음악을 해도 그저 얼굴이 예쁘니 좋아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게 스텔라장을 "얼굴은 예쁜 인디 뮤지션"이라는 라벨을 붙여놓고 잊어버린지 반 년 정도 지났나, 정말 우연히 - 위대한 유튜브의 추천 알고리즘 덕에 - 그녀의 노래를 듣게 되었다. 90년대 풍의 밴드 구성의 반주에 다른 작업을 하던 창을 내리고 유튜브창을 켰다. 그런 날이 있다. 정말 좋은 날이 길을 걷거나, 스트리밍 랜덤 셔플을 하거나, 그런 순간에 내 귀에 탁 꽂히는 순간. 이런 곡을 내가 아직도 몰랐다니, 오늘은 운 좋은 하루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열어본 유튜브 창에 써진 이름 "스텔라장". 놀라움. 그리고 이런 음악을 하는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 그 모든 것의 이후에 밀려오는 부끄러움을 애써 외면하며, 마음속에 붙여뒀던 라벨을 살며시 떼고, 그녀의 음악을 감상했다. 모던 록 구성의 곡을 타고 흘러나오는 담백하고 청아한, 내가 정말 좋아하는 스타일의 보컬.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엉뚱한 듯 하면서도, 내용이 있는 가사였다.


스텔라장 - 환승입니다

신분당선을 타고
강남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
1-1번 문 앞에 서서
열차를 기다리다가
눈물이 났어
화도 났어
그렇게 그 여자가 넌 좋았니

지하철에서 내려 밖에
나와서 마을버스로 갈아타
가방을 뒤져 지갑을
빼서 교통카드를 찍다가
눈물이 났어
화도 났어
어쩜 그리도 빨리 넌 변했니

여유가 없어졌다며
누굴 만날 준비가 안된 것 같다며
차라리 내게 말해 주지
그랬어 (말해 주지 그랬어)
이젠 내가 싫어졌다고

난 나중에 아주아주 부자가 될 거야
어딜 가든 택시만 타고 다닐 거야
아니면 내 차를 몰고 다닐 거야
다신 내가 갈아탈 일이 없게
다신 내가 널 생각하지 않게

오지라퍼들 뭘 봐
설마 우는 사람 처음 봐
걱정 마 몇 년만 지나면
다시 볼 일은 없을 테니까
부자가 돼야지
택시만 타야지
면허는 있어도 난 운전은
못 하니까 자차는
나중에 사야지  

시간이 없어졌다며
너무 바빠 널 못 만날 것 같다며
차라리 내게 말해 주지
그랬어 (말해 주지 그랬어)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난 나중에 아주아주 부자가 될 거야
어딜 가든 택시만 타고 다닐 거야
아니면 내 차를 몰고 다닐 거야
다신 내가 갈아탈 일이 없게
다신 내가 널 생각하지 않게

플랫폼에서 방금 전
놓친 열차를 바라보다가


 깊이가 없는 가사를 정말 싫어한다. 그리고 내가 들은 스텔라장의 "환승입니다"의 가사는, 많이 가벼웠다. 바람을 피워 날 떠나간 애인을 생각하면서, 부자가 될 거다. 그리고 지하철이나 버스 대신 택시를 탈 거다. 면허가 없으니까 차는 나중에 살 거다. 많이 엉뚱한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전 남친의 외도라는 힘든 상황을, 다소 엉뚱하지만 눈물섞인 씩씩한 태도로 이겨내려 하는 젊은 여성의 입장을 표현하는데는 정말 적절한 표현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외도를 "환승"에 빗대서, 환승할 일 없는 택시나 자차를 탈 것이라는 비유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사가 가볍기는 가벼운데, 그 가벼움이 싫지 않았다. 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곡의 매력을 끌어올렸다. 가벼움과 진중함의 경계에 있는 것 같았다. 섣부른 판단으로 정말 좋은 뮤지션을 그냥 지나쳐갈 뻔 했는데, 다행이 알맞은 때에 내리는 데 성공했다. 내가 알고 있는 많은 진중한 뮤지션들에 비하면 많이 키치하지만, 그런 점이 나의 플레이리스트를 약간은 엉뚱하게, 가볍게 만들어 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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