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알 수 없다
나는 기타리스트가 아니다. 기타리스트의 정의를 기타를 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단순히 기타를 연주하는 데에 열정을 가지고 나아가는 사람을 포괄적으로 칭하는 데에 둔다고 가정했을때의 이야기다. 주변의 기타리스트 친구들은 자신의 스타일에 맞춰서 기타를 산다. 가령 몇 프랫까지 연주 가능하고, 솔로잉을 하는데 좋은 바디 모양인지, 픽업은 싱글인지 험버커인지, 튜닝하기에 크게 불편한지 아닌지, 그런 것들이 친구들이 기타를 구매하는데에 고려하는 옵션이다.
밴드에서는 보컬을 맡고 있었기에 스스로를 기타리스트가 아닌 보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때문에 기타를 구매하는데 있어서 기술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아도 됬다. 개인적으로 사고 싶었던 것은 통기타 곡을 연주해도 이질감이 없는 소리를 가진 일렉 기타였다. 내가 연주할 줄 아는 곡, 그리고 좋아하는 곡은 대부분 어쿠스틱 기타 곡이거나, 모던 락, 브릿 팝 쪽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통기타를 사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였지만, 몇 년간 통기타를 쳐 왔기 때문에 이번에는 일렉 기타가 갖고 싶었다.
주변의 친구들은 기술적인것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나의 사정을 알고는 예쁜 기타를 사라고 했다. 예쁜 기타를 사면 볼 때마다 기분이 좋고, 손도 자주 가기 마련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말이다. 할로 바디는 외형으로 치면 꽤 예쁜 편에 들었다. 게다가 할로 바디는 소리가 다른 일렉 기타에 비해 꽤 어쿠스틱한 편이었다. 점점 조건이 좁혀져 가고 있던 와중, 문제에 봉착했다. 자금 사정이 넉넉치 않았고, 기타를 엄청 잘 치지도 않기 때문에 저렴한 기타를 구매하고자 했는데, 할로 바디 기타는 가장 저렴한 모델도 신품가는 50만원, 중고가는 30만원 정도로 형성되어 있었다. 신품가로 30만원 정도 낼 용의가 있었던 나에게는 꽤나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
싸고, 할로 바디이고, 예쁘고. 그런 필터링을 모두 만족한 것은 에피폰의 닷이라는 모델이었다. 필요없는 것은 전부 덜어낸 듯한 디자인. 가격 대비 칠 만한 품질의 세미 할로 바디 기타. 중고 가격은 가끔 25만원정도로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뮬 어플을 깔고, 수시로 게시판을 모니터링하기 시작했다. 어느 분야에서건 그렇지만, 평소에는 매물이 많은 물건임에도 내가 사려고 하는 순간 잘 올라오지 않는다. 닷 역시 하루에 많으면 5건 이상의 매물이 올라왔지만, 네츄럴 색이 아닌 체리 색이나 썬버스트 색이라거나, 갈 수 없는 지방의 판매자라거나, 보증서가 없다거나 하는 매물만 잔뜩이었다. 계속 매물을 기다리던 나는 지치고 말았다. 체리 색이나 썬버스트 색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밴드 친구들과 저녁 약속이 있던 어느 날, 술자리의 화두 중 하나는 나의 기타였다. 세션 친구들은 내 고민을 듣더니 체리나 썬버스트 색도 예쁘니까, 그냥 나와있는 매물을 구입하는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의견을 주었다. 그렇게 술을 마시다가, 뮬에 들어가서 또 매물을 뒤지는데, 역시 내가 찾는 네츄럴 컬러의 에피폰 닷은 없었다. 정말 우연히 검색어를 에피폰 할로 바디로 바꿔 보았다. 더 비싼 모델이 주르륵 나오는데, 마침 40만원에 올라온 에피폰 카지노 네츄럴 컬러가 눈에 들어왔다. 다른 친구가 과거에 사용했었던 모델이고, 이름이 독특해서 매물을 한번 둘러보게 되었다. 옆 자리에 앉아서 술을 마시는 기타리스트 친구에게 카지노는 어떤 기타냐고 물었다. 닷과는 다르게 할로 바디여서 범용성이 떨어지지만, 소리가 통기타에 가까워서 내가 하는 음악과는 잘 어울릴 것이다, 닷보다는 상위 모델이다 같은 이런저런 설명을 하던 친구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거 코프시럽 기타잖아! 라고 말했다. 코프 시럽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였다.
물론 영 더 자이언트의 기타리스트가 치는 기타가 내 에피폰 카지노처럼 인도네시아 공장에서 나온 모델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200만원짜리 일제 에피폰 카지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같은 에피폰 카지노라는 모델이기는 하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을 연주하는데 쓰인 기타와 같은 모델이라면 나름 드림 기타라고 할 만한데, 마침 닷과는 별로 가격 차이도 나지 않는 중고 매물이 올라온 것이다. 그렇게 정말로 우연히도 나는 에피폰 카지노를 사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고, 바로 판매자에게 연락했다. 지역은 인천이었지만, 다음 날 한달음에 달려가 기타를 구매하게 되었다.
정말로 우연히 구매한 내 에피폰 카지노는 사기 전에 정했던 모든 조건을 만족한다. 앰프에 물려도 클린톤에서는 어쿠스틱한 소리를 내 주고, 톤을 대충 잡아도 모던 락에 어울리는 소리를 내 준다. 풀 할로 바디의 편협한 소리라는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긴 하지만, 내 음악 취향 역시 꽤나 편협하기 때문에 만족스럽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타가 정말로 예쁘다. 따로 연주하지 않고 꺼내 놓기만 해도 행복하다. 친구들의 조언이 맞았던 셈이다. 이 기타를 사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매우 우연이었지만, 아주 만족스럽다. 기타를 구매했던 경험은 인생은 알 수 없다는 말이 가진 의미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어떤 정해놓은 틀에 맞춘 이상형을 찾지만, 이상형과 다른 사람과 연애하게 되고, 의외로 잘 맞는다는것을 깨닫게 되는 삶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