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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리밀 Feb 20. 2017

밤길, 비, 소리

 11시. 단 것이 필요해지는 시간이다. 궁금해진 입이 보채서 냉장고며 찬장을 열어 보았지만, 단 것이라곤 설탕통에 든 백설탕 뿐이었다. 할 수 없이 슬리퍼에 트레이닝복, 그 위에 패딩을 대충 걸치고 밤거리로 나섰다. 가로등 불빛 사이로 이슬비가 분무기의 그것처럼 흩뿌려지고 있었다. 다시 방까지 올라가기 귀찮기도 하고, 이 정도 비면 패딩 모자를 뒤집어쓰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가려질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비 맞는것이 딱히 나쁘지 않아 우산을 챙기지 않은 채 그대로 빗속을 걸었다.


 일본에 다녀온 뒤로 음악을 잘 듣지 않게 되었다. 일본, 그 중에서도 도쿄를 고스란히 느끼고 싶어 4박 5일을 머물기로 정한 것이다. 그런데 그 풍경 속에서 음악이나 꽂고 있는것은 모순이었을 것이다. 적막한 마을에 흐르는 까마귀 울음 소리, 재잘거리는 사람들의 말소리라던가, 지하철 플랫폼에 서 있으면 들려오는 간신히 역명 정도 알아들을 수 있는 안내방송, 귀여운 점원의 사근사근한 말투,  매장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소리는 어떠한 순간을 구성하는 큰 조각 중 하나라는 것을 여행의 순간들을 곱씹으며 깨달았다. 그래서 5일간 음악을 듣지 않던 버릇에, 일부러 조금 덜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더해져 요새는 길을 가며 음악을 잘 듣지 않게 되었다.


 그런 배경으로, 평소같았으면 잔잔한 브릿팝을 들으며 거닐었을 밤거리를 나는 귀에 아무것도 꽂지 않고 걷게 되었다.


 열한시쯤의 밤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원래 사람이 다니지 않는 시간인데다가, 옅게 내리는 비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발자국 소리에, 떨어지는 이슬비가 아스팔트 바닥, 건물의 벽, 그리고 내 패딩을 때리는 소리를 들으며 골목 편의점으로 가는 길에 문득, 음악을 안 들으니 이런 것도 들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비를 맞아본 적은 세네번 정도 있었다. 그 경험들 중, 누군가와 같이 맞았던 순간이 더 강하게 기억에 남는다. 그때는 대화를 하고 있었고,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 순간 속에 있었다. 비를 혼자 맞았던 순간들은 어떤 음악을 들었는지, 그리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가 더 기억에 남는다. 그 순간은 희미하게 남아있다. 그 순간의 대략적인 상황, 음악을 들으며 했던 생각, 그런 그림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마치 몸에서 나와 둥둥 떠 있는 채로 생각을 하고, 남아있는 내 몸은 목적지로 발걸음을 옮길 뿐인, 그런 느낌이랄까.


 글을 쓰는 대부분의 좋은 영감은 음악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했는데, 음악을 듣지 않은 채로 길을 걸었기 때문에 영감을 얻어서 글을 쓰게 되었다. 일상에 더 잘 스며들기 위해서, 그리고 고스란히 그 순간만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서, 이어폰을 조금은 덜 꽂고 있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드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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