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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Apr 14. 2023

마요네즈 이야기

마음 전하는 40년 지기 

    

친구를 처음 만난 건 늦봄이었다. 내가 6살 무렵 할머니와 버스를 타고 장남의 결혼식을 하루 앞둔 고모할머니네 집을 찾았다. 지금은 찾기 힘든 풍경이지만 그때만 해도 고향 제주에선 결혼잔치를 집에서 했다. 친척이며 온 동네 사람이 몇 날 며칠을 준비할 정도로 온 마을의 축제였다. 부모님 품을 떠난 첫 외출이었다. 수줍음이 많던 난 골목을 지나 목적지에 다다르자 할머니 등 뒤로 숨어 버렸다.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자마자 우리 앞에는 맛있는 한 상이 차려졌다. 돼지고기 수육과 성게국, 여러 가지 찬이 놓였다. 내 눈을 멈추게 한 건 하얀 크림 같은 게 덧입혀진 과일이었다. 어색한 마음에 주저하다 너무 궁금해서 젓가락으로 사과를 콕 찍어 먹었다. 내 앞에 바로 신세계가 펼쳐진 것 같았다. 달콤하면서도 고소함이 함께 머무는 부드러움이 백미였다. 밥과 함께 이것저것 다른 것들을 맛보면서도 그 친구에게 손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사과와 배, 건포도, 오이가 어우러졌다. ‘이건 도대체 뭘까? 하얀 국물이 보이는 게 밀가루를 넣은 걸까? 흰 밀가루를 물에 섞은 걸까? 그건 익혀 먹어야 하는데….’ 여러 생각이 바삐 오갔을 뿐 누구에게도 그것이 무엇인지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할머니 나 저 하얀 거 묻힌 거 또 먹고 싶어.”

하룻밤을 자고 왔는데 그동안 대여섯 번은 족히 찾았다.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동네 아이들과 놀다가도 자꾸 하얗고 고소한 그 친구가 아른거려 참기 힘들었다. 그때마다 할머니를 졸랐고, 납작한 스테인리스 접시에 가득한 것이 어느 순간 쏜살같이 비워졌다. 어른들은 그것을 '사라다'라 불렀다. 충분히 맛봤다고 여겼는데 돌아서면 다시 생각났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알게 되었지만 그건 마요네즈였다. 매일 김치와 된장국이 주인공인 밥상이었다. ‘샐러드’라는 단어는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다. 초등학교 5학년 정도가 되니 엄마가 아주 가끔 마요네즈를 사 왔다. 그때마다 이 소스가 무슨 마법을 부리는 것 같았다. 야채와 특히 사과, 당근에 잘 어울렸다. 어느 해에는 이웃이 갖다 주어 당근이 풍년이던 시기가 있었다. 엄마는 과자 대신으로 당근을 살짝 데쳐서 마요네즈로 버무려주었다. 한동안 심심할 때마다 먹었고 당근과 친해지는 경험이었다. 진심이다. 마요네즈 당근은 맛있었다.      


내가 다시 마요네즈의 특별함을 알게 된 건 자취생활을 하던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학교와 집은 거리가 너무 멀었고 교통 또한 좋지 않아서 시내에서 혼자 생활해야 했다. 무엇이든지 스스로 하면서 지내야 했던 그때, 시험 기간에는 엄마가 막차를 타고 와서는 도시락을 챙겨주었다. 고등학교 첫 시험이었다.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혹시 엄마일까 하고 기다림에 지쳐갈 무렵이었다. 엄마는 내 이름을 부르며 방 안으로 들어섰고, 고단했는지 적당히 공부하고 자라는 말만 남기고 금세 꿈나라로 갔다. 첫 시험이라는 불안함에 마음은 널뛰었고 책상에서 이 책 저책을 뒤적거리다 잠들었다. 

마요네즈가 함께한 감자 샐러드

이른 새벽이었는데 부엌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미닫이문을 살짝 열어보니 엄마가 뭔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동그랑땡을 한 접시 해놓고는 작은 양푼에 감자를 숟가락으로 꼭꼭 누르고 있었다. 뭘 하려는 것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아침밥상을 받아 들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접시에 수북이 올려진 건 감자 샐러드였다. 으깬 감자에 마요네즈를 넣고 집 마당에서 자란 부추를 뜯어와서 송송 썰어서 올렸다. 봄날 새싹이 돋아나는 것처럼 싱그러웠다.  

“이거 한 숟가락 떠먹어 봐라. 감자 샐러드라는 건데 기분이 좋아질 거야. 부드럽고…. 다 잘 지날 거야.”

엄마는 숟가락을 들어 샐러드를 떠주며 나를 안심시켰다. 두려움이 가득했던 시험 보는 날이었지만 접시에 가득했던 걸 비웠다. 몇 시간 후면 닥칠 일들을 모두 잊게 했다. 감자 샐러드는 그날 도시락 반찬 한편을 당당하게 차지했다.    

  

이젠 나를 위해 마요네즈를 꺼내 든다. 가족을 위한 요리에 집중하다가 멈추고 싶을 때 제일 먼저 이것을 떠올린다. 마요네즈의 은은한 연노랑 크림 빛깔은 가속도가 붙어서 불꽃이 튈 것 같은 내 마음을 진정시킨다. 말랑말랑한 튜브 용기를 드는 순간부터 여유가 찾아온다.     

 

나를 위로해 주는 모닝빵 샌드위치가 떠올랐다. 달걀을 삶고 오이와 사과를 사각 썰기 한 다음 마요네즈를 넣고 섞어주면 끝이다. 모닝빵 사이에 이것을 담고 한 입 베어 물면 뽀송뽀송한 새 이불을 살짝 덮은 편안함이 밀려온다. 어느 집 냉장고에 있을 법한 평범한 것들이지만 마요네즈와 만나면 아주 특별한 것으로 변신한다.


조금 과장한다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난다. 폭신한 빵을 가득 채운 샐러드는 나를 살며시 안아주며, 그동안 수고했다고 어루만져 주는 것 같다. 샌드위치 두 개를 가만히 앉아서 천천히 먹었다. 오롯이 나 혼자만을 위한 시간이 흘러간다. 


마요네즈는 내 가슴속의 응어리를 종종 풀어주는 요술을 부린다. 소박한 샌드위치 앞에서 평화가 찾아온다. 있는 그대로의 현재에 만족하기보다는 무엇을 더 채워 넣는 일에 몰두하는 게 일상이다. 그러다 마요네즈를 들어 손에 살짝 힘을 주고 쭈욱 짜내어 양배추나 과일에 비벼 먹으면 절로 미소 짓게 된다. 


다른 것을 힘들게 찾거나 더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가볍게 부담 없어서 언제나 가까이 두게 되었다. 꼬꼬마이던 시절 잔칫날 마주했던 그것은 40년이 지난 지금 친구가 되었다. 언제 불러내어도 한결같음으로 나를 반긴다. 부드럽고 달콤하게, 그래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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