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맞이 점심
벚꽃이 피었다. 햇빛이 쨍하고 빛나는 날이다. 봄을 이제야 느낀다. 내 주변은 달라진 게 없는데 그냥 마음이 좋다. 황사가 심했던 주말 동안은 밖을 봐도 별 느낌이 없다. 하루 사이에 맑은 파란 하늘을 보여주었다.
이날을 잘 보내야겠다는 다짐이 선다. 어떻게 해야 그러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게 주어진 시간 동안 한눈팔지 않고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적절하게 나눠본다. 오전은 집안일이다.
이불과 베갯잇을 빨고 거실 카펫도 바꿨다. 집안 문이란 문은 모두 열고 바깥공기를 받아들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러면 꼭 얇은 점퍼를 껴입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 따뜻하고 싱그러운 바람을 충분히 느낄 만큼 공기가 달라졌다.
두세 가지를 일을 하다 보니 점심이 다가온다. 대충보다는 지금 풍경과 어울리는 것을 먹고 싶다. 언제 사놓은 지도 희미해질 정도인 라이스페이퍼가 생각났다. 월남쌈을 만들기로 하고 집에 있는 채소를 꺼냈다.
양배추와 양파, 당근은 동백기름에 살짝 볶았다. 배를 채 썰고 엄마가 보내준 적색 치커리, 삶은 달걀 하나를 썰었다. 미지근한 물에 라이스페이퍼를 담갔다 꺼낸 후에 재료를 차례로 놓고 돌돌 말면 끝이다. 그렇게 몇 개를 만들었다. 소스는 간단하게 머스터드소스에 매실청을 아주 조금 넣었다. 그동안 해보지 않은 조합이었지만 괜찮다.
라이스페이퍼는 투명할 만큼 얇아서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다 보인다. 별 재료가 없어 기대를 안 했는데 맛있다. 재료 하나하나가 입안에서 각각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채소는 나물로 평소 스타일대로 먹었으면 매일 먹는 밥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것을 하나의 구역 안에 모아놓으니 새로운 것이 되었다. 부드러운 맛을 잃어버린 붉은 치커리는 라이스페이퍼 안에 숨어 들어서는 그런 단점이 어딘가 꼭꼭 숨어 버렸다. 부드러운 채소들에 쌓여서 그런지 아무런 인식 없이 넘어간다. 서로서로 안아주는 모양이다.
집안일을 대충 끝내고 먹는 점심은 여유롭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건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서 생활하는 내 일의 시간이기도 했다. 한편으론 떠오르는 복잡한 생각들 속에서 깨어 있으려 한 나름의 노력이다.
어릴 적 기억은 어른이 되어서도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것이 걸림돌이 되어 과거를 탓하거나 주저앉아 버린다면 그 또한 문제다. 이미 지났기에 지금의 나로 바로 서야 한다. 그때는 선택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그럼에도 정서적인 분위기는 어릴 적 경험한 울타리 안에서 살아 숨 쉰다. 이 봄이 되면 정신없이 바쁘던 부모님의 마음이 내게로 찾아온다. 무엇이든 해야 할 것 같고, 때로는 별로 한 게 없어서 실망한다.
날이 쨍하고 좋은 날은 게으른 나를 바라보기가 힘든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제 그럴 필요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슴이 먼저 그렇게 향한다. 내 봄을 만들기 위한 점심밥이다. 점심 준비는 단순해 보이지만 원하는 것을 찾고 행동으로 이어지도록 짧은 시간 집중해야 한다. 뻔한 듯 하지만 정성이 머무는 소중한 한 때다.
무엇이 다 갖춰진 평화로운 시절은 찾아오지 않는다는 걸 안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너희가 대학에 가면, 취직하고 결혼을 하면, 걱정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야. 자식 걱정은 부모의 평생 일이지.”
어느 날 엄마가 얘기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것을 내 삶에 비춰보면 맞는 말이다. 고개를 겨우 넘어 잠시 숨 고르기를 하면, 다시 고개가 나타나 그것을 마주하고 헤쳐가야 한다. 이런 일들의 연속이 살아가는 일이다.
그래서 지금이 가장 좋은 시절이다. 월남쌈을 앞에 두고 봄바람을 느끼며 한가로이 점심을 먹는다. 며칠 전 지인의 전화를 받고는 드문드문 마음이 쓰여 가슴이 아팠다. 내가 해결해 줄 수도 없는 일이지만, 어려움의 깊이가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럼에도 일에 집중할 때는 봄 속에 내가 있고, 서서히 평화도 찾아온다. 누구의 말처럼 끝이 있기에 그의 어려움도 따스한 이 봄에 천천히 잘 지나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