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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Apr 05. 2024

동백꽃 너머 동백기름

화려함 지나 소중함

바야흐로 동백꽃 필 무렵이다. 고향 집 동백꽃은 초겨울부터 피기 시작해 봄이면 꽃이 차츰 질 때지만 지금 우리 동네엔 한창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곳곳에 얼굴을 보이는 동백은 겹겹이 화려함을 자랑하는 서양 동백이다.  

   

아이와 산책을 나갔다 우연히 마주친 하얀 동백과 장미꽃보다 더 진한 붉은 동백은 가던 걸음을 멈추게 했다.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을 만큼이다. 이 꽃을 코코 샤넬이 사랑했다고 하는데 순간 그 느낌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이제야 동백꽃이 보인다. 어릴 적 동네 어디서나 보였기에 특별하다 여기지 않았다. 그러다 이제 이 꽃을 만나면 반갑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꽃의 구석구석이 보인다. 이런 관심은 동백꽃의 선물이라고 여기는 ‘동백기름’으로 이어진다.     

 

어린 시절 감기에 걸려 기침이 쉬이 가라앉지 않으면 엄마는 동백기름 한 숟가락을 약처럼 건넸다. 때로는 식용유를 대신하기도 했고, 할머니 쪽 찐 머리를 마지막으로 빛나게 감싸주는 머릿기름으로도 활용되었다. 

  

동백은 겨울부터 봄까지 꽃이 피고 나면 그 자리에 열매가 맺힌다. 뜨거운 여름을 잘 보내면 둥글둥글 한 그것이 초록색에서 점차 갈색으로 변한다. 그때 열매가 알밤 벌어지듯 하면 다 익었다는 증거다. 이즈음부터 열매가 나무 주변 사방으로 데굴데굴 굴러다닌다.     

지난가을 동백으로 짜낸 기름

우리는 이것을 ‘동박’이라 불렀는데, 엄마는 이걸 틈만 나면 주웠다. 아침 일찍 일어나 마당에 떨 어진 게 있으면 부지런히 움직여 바구니에 담아두고, 과수원에서도 일하다 짬이 날 때면 주위에 보이는 것들을 챙겼다. 그래서 이맘때 엄마의 바지 주머니는 가장 간편한 저장소가 되었다. 

 

단단한 동백 열매껍질 속에 있는 씨앗을 말려 기름을 짜야 만날 수 있는 동백기름.  엄마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어린 마음에는 말끔히 포장된 시판 식용유가 더 끌렸지만 이젠 무엇보다 귀한 것이 되었다.    


“이게 올리브유보다 더 좋은 거다. 그건 외국에서 오는 거니까 변하지 말라고 무엇을 하는지 모르지만, 동백기름은 아무것도 안 한 건강한 거야.”

엄마는 삼다수 500밀리미터 페트병을 꽉 채운 동백기름을 주면서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강조했다. 엄마의 동백기름은 이전까지 최고라 여겼던 엑스트라버진 올리브유를 앞선 지 오래다.     


목이 불편할 때면 이 기름을 한 숟가락 떠먹어도 느끼하지 않다. 오히려 담백하다. 어릴 적에는 냄새가 진하다 여겼는데 이제는 깔끔함에 이어 다가오는 희미한 쌉싸름함이 좋다. 다른 날보다 귀하게 달걀 프라이를 하고 싶을 땐 식용유가 아닌 이것을 팬에 몇 방울 떨어트린다.  남편과 아이를 향한 나만의 응원방식이다. 정성과 바람을 담고 싶은 날에도 이것을 사용해 종종 요리한다.   

  

나를 위해 즐겨 먹는 당근 볶음을 할 때도 사용한다. 그러다 문득 기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될 때는 손을 멈춘다. 아껴먹어야 할 시간이다. 다시 만나게 될 때는 다가오는 겨울이니 아직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동백기름 당근 채소 볶음

이렇게 유난을 떠는 건 동백기름이 어디에서 왔는지 보지 않아도 훤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가장 가까운 곳, 우리 집과 과수원에서 엄마가 굽은 허리를 더 굽어가며 열매를 줍고, 다시 맑은 바람과 햇빛이 단단히 말려주어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내가 몇 번이나 동백기름을 줄 수 있을지 몰라.”

가끔 엄마가 이런 말을 건넨다. 그러면 난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고 한마디 하고는 그 상황을 정리한다. 집에 돌아와서 기름병을 들어서 음식을 만들다 문득 울컥해질 때가 있다. 이 기름 한 방울은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하는 엄마의 진한 사랑을 누르고 누른 결정체라는 것.     


엄마가 보낸 쑥갓을 동백기름과 간장을 넣고 무쳐내었다. 아이들과 남편은 접시에 담긴 그것의 의미를 잘 모른다. 

“이거 할머니가 농사지은 귀한 거야 그러니 꼭 한 번씩이라도 맛보고.”

이렇게 한마디 하고는 그 이상을 설명하지 않는다. 주저리주저리 말하는 대신 그때의 감정을 혼자 간직하고 싶다.

   

꽃은 화려해서 어느 곳에서나 주인공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고 난 후를 돌아보는 일은 드물다. 동백기름은 꽃 너머로 이어지는 자연의 에너지를  담았다. 지난겨울에 가져온 기름이 줄어간다. 이것을 잘 활용해 맛있게 먹고 건강해야 할 것만 같다. 그것이 엄마를 향한 최고의 선물일 듯하다. 돌아오는 늦여름 무렵부터 엄마는 또 동백 열매를 주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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