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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Sep 09. 2024

있는 대로 채소튀김

      

여름이 떠나려다 잠시 길에 멈춰 섰다. 여전히 덥다. 매일 해야 하는 일이 나를 찾는다. 밥하고 빨래를 하고, 잠깐은 아이와 얘기도 한다. 아직 회복이 덜 된 남편을 잠깐씩 본다. 

 

편안함보다는 모든 것들이 뒤엉켜 있다. 그렇다고 이런 상태에 머물러 있을 만큼 여유도 없다. 적당한 간격으로 해야 할 일이 대기 중이다.     


여기에 날씨까지 한몫한다. 마음에서  살짝 화가 날 무렵이다. 저녁 준비를 하려다 무언가 생각났다. 채소튀김이다. 먹고 싶은 게 별로 없었는데 별안간 이것이 자꾸 눈에 아른거린다.   


아침에 사다 놓은 고구마가 있다. 여기에 더할 것을 찾아보니 깻잎 한 봉지가 보였다. 급한 대로 이 두 가지와 자색 양파를 조금 썰어 두었다. 

    

집에는 튀김가루도 없다. 부침가루와 일반 밀가루를 조금 섞어서 반죽했다. 차가운 물과 달걀 하나를 깨트려서 채소와 잘 버무려 주면 끝이다. 식용유가 담긴 웍에 튀김을 하나씩 넣었다. 거품을 내며 채소가 튀겨진다.     

적당히 예닐곱 개를 만들었다. 다른 저녁 찬과 함께  곁들여 먹었다. 두 개를 먹었더니 온종일 답답했던 가슴 한 편이 편안해졌다. 못난이 기다란 햇고구마도 꽤 제 역할을 했다.

깻잎의 고소함과 양파의 달콤함에 알 듯 모를듯한 고구마의 포근한 단맛에 어우러진다. 


어떤 음식을 기다리는 건 몸이 먹고 싶다는 신호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동안 남편이 아프다는 것에 힘들다고 혼자 아우성치던 내가 이것으로 한숨 돌리고 싶었나 보다. 그래도 미련이 남았는지 다음날도 튀김을 조금 만들었다.        

  

이번엔 당근까지 더했다. 학원에 아이를 내려주고는 동네 마트로 향했다. 없어서 튀김을 만들 때 아쉬움이 컸던 당근 한 봉지를 샀다. 주황색 당근의 달큼함은 채소튀김의 성공을 좌우할 만큼 강력했다.    

 

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그것 없이 만들어 보니 빈자리가 컸다. 점심 무렵에 어제 튀긴 기름도 남아있고 해서 후다닥 만들었다. 역시나 이번엔 고구마와 깻잎이 조금밖에 없다. 무언가 하나를 채워 넣으면 다른 게 빈다.      

가끔 음식을 만들며 알게 되는 건 모든 게 연결되어 있다는 거다. 먹는 일이나 살아가는 일이나 빈틈없이 채우는 일이 어렵다. 그만큼 여러 가지를 집중하고 챙겨야 하지만  간단치 않다. 하나에 몰두해 있으면 다른 하나는 자연스럽게 잊힌다.      


그러다 어떤 일이 일어나면 다시 그것에 고개를 돌린다. 채소튀김을 생각해 두었으면서도 당근이나 여러 재료를 살펴보지 않은 건 그래도 괜찮은 일에 속한다. 대부분은 단순하지 않은 일들에서 구멍이 생겼을 때 당황하고 헤맨다.     


벌어진 상황을 잘 바라보고 수습하는 일에 집중해야 하는데 이랬으면 어땠을까? 하는 과거에 머물며 자책할 때도 있다. 그러다 얼마의 시간을 보낸 후에야 현재로 돌아온다. 그때서야 해야 할 일을 알게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다.     


그땐 또 그런대로 보내야 한다. 당근이 없을 땐 그런대로 만족했다. 다음 날 이것을 더하니 어제보다 좋았다. 주황색의 밝음만으로도 훌륭했다. 어제가 없었으면 몰랐을 작은 변화다. 남편 역시 어릴 적 시장에서 사 먹던 추억이 떠오른다고 했다.     


아이에게는 없는 우리만 아는 옛이야기를 잠깐 나눴다. 나는 튀김을 먹으면서 쉬었다. 누군가 만들어준 음식이 주는 편리함을 그리워하지만 내 손으로 만든 그것이 크게 다가오는 날이 더 많다.    


당근이 싫다는 아이를 위해 당근 없는 튀김을 먼저 만들었다. 그동안은 없었던 일이다. 굳이 강요하고 싶지 않은 날이었다. 때가 되면 무리 없이 받아들이는 날이 오겠지 싶다. 


마법처럼 순식간에 원하는 방향으로만 나아가야 한다는 조급함을 버리면 천천히 내 시간이 찾아온다. 그때그때 있는 대로 요리해도 충분하단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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