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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밥 김밥

익숙해서 특별한 밥

by 오진미

사흘 만에 다시 김밥을 말았다. 지난밤 아이들에게 아침으로 김밥이 괜찮은지 물었더니 모두가 좋다고 했다. 처음에는 내가 왜 이걸 물었지 하고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는데 이제야 알겠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며칠 전 유튜브에서 김밥 영상을 보고 먹고 싶었는데 지나쳤다.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때 마음이 사라지지 않다가 살며시 고개를 들었던 모양이다.


금요일 아침밥은 김밥이 낙점되었다. 우리 집에서 김밥은 특별하지 않다. 그냥 매일 먹는 밥에 가깝다. 그럼에도 김밥이 나오면 “아 김밥!”하고는 짧은 한마디를 하고 식탁의자에 앉는다. 그건 한결같으면서도 다른 밥이기 때문이다.


김밥과 어떻기 이렇게 가까워졌을까? 김밥을 좋아하지만 아침부터 김밥을 준비하고 접시에 올리고 나면 힘이 빠졌다. 가끔 나들이 도시락으로 이것을 준비해 가는 날도 비슷했다. 다른 식구들은 즐겁게 먹지만 난 그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부엌에서 벌어진 일에 비해서 그건 너무 소박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면서 그때 내게 다가온 건 허탈함이었다. 그래서 그때는 김밥을 지금처럼 자주 먹지 않았다.


우리 집 김밥은 집에 있는 것들로 하는 그야말로 집밥이다. 그나마 꼭 들어가는 건 당근, 묵은지, 유부다. 이것 또한 집에 없을 때면 그냥 지난다. 우리 집 김밥은 지금 냉장고에 어떤 먹거리가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바로미터다. 김밥을 위해 햄을 사는 일도 가뭄에 콩 나듯 한다. 어찌 보면 여러 재료가 들어가지 않아서 간단하고 편하게 만드는 동력으로 이어진다.


김밥 속 재료준비는 복잡한 것부터 시작하는 나만의 루틴이 있다. 냉동 유부를 채 썰어 뜨거운 물에 데친 다음 꼭 짜둔다. 이어 간장과 식초 맛술, 매실청을 넣고 국물이 끓어오르면 유부를 넣고 조리게 되는데 이것이 가장 우선이다. 그다음은 묵은지다. 오랜 시간 두어서 자칫 텁텁할 수 있기에 묵은 양념을 적당히 씻어낸 다음 기름 두른 팬에 매실청을 놓고 단숨에 볶아낸다. 당근도 채를 썰어서 소금 넣고 볶고 마지막으로 보통 달걀 대여섯 개로 지단을 만든다. 손에 양념이 묻을 수 있는 일부터 하고 나면 도마와 주변이 시간이 갈수록 깔끔해진다.

우리 집 김밥

여기에 상황에 따라 깻잎이나 상추가 따라온다. 아침처럼 참치마요네즈 샐러드를 간단히 만들어서 더할 때도 있다. 햄이나 고기가 들어가지 않는 대신 이것으로 충분히 고소한 맛을 낼 수 있다. 담백하게 먹고 싶을 땐 다진 청양고추도 더한다. 간장과 설탕을 반 티스푼 정도 샐러드에 넣으면 더 깊은 맛이 난다. 어제 사둔 오이가 생각났다. 아주 가늘게 썬 다음 소금에 살짝 절여서 볶았다. 이렇게 준비가 다 되면 방금 지은 밥에 재료를 넣고 돌돌 말면 끝이다. 이날처럼 다른 때보다 김밥 속이 풍성해지는 날은 내 몸과 마음이 괜찮은 날이라는 간접 증거다.


김밥은 아이와 우리 부부의 것으로 구분된다. 아이들은 당근과 오이를 뺀다. 어느 날은 편식을 오히려 부추기는 것 같을 때도 있지만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부터 몸에 좋다며 강요하기는 싫다. 나이가 들면서 드는 생각은 어느 때가 되면 다 알게 되는 것들이 있기에 그리 억지로 할 필요도 없는 듯하다. 이것을 조금 먹지 않았다고 당장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닌데 기분 좋게 먹고 학교에 가면 그만이다.


집에 있는 것으로 김밥을 싸니 모든 과정이 가벼워졌다. 자주 하다 보니 준비부터 끝나는 시간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어느 날은 내 몸과 마음이 김밥에 최적화되어 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우리 집 김밥은 더하려 애쓰지 않는다. 유부, 달걀, 묵은지 삼종이 속 재료의 전부일 때가 대부분이다.


사람들은 열심히 노력하는 일보다 즐겁게 하는 일이 오래간다고 한다. 내가 김밥을 만드는 상황과 어울린다. 김밥을 만들 땐 잘하려는 의지보다는 매일 밥 먹는 일에서 살짝 다른 길로 들어서는 정도의 가벼움이 머문다. 없는 것을 마련하기 위해 애쓸 일이 없으니 준비해야 한다는 긴장이 찾아올 일도 없다. 김밥 모양과 맛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기에 밥 위에 재료들을 하나씩 올리며 혹시나 하는 다른 마음이 끼어들 틈이 없이 안정적이다.


아침 식탁에 오른 아이들 김밥은 가을날 흐린 오후 같다. 당근과 초록 오이가 없으니 당연하다. 남편과 내가 먹을 것은 여름으로 가는 봄이 살짝 담겼다. 흰 밥 사이에 콕콕 박힌 빛나는 당근색을 통해선 다가올 여름의 어느 시골 담벼락 능소화도 떠오른다. 김밥이 일상처럼 느껴질 때가 돼서야 그 멋을 아는 것 같다. 김밥은 어제의 것과 같지만 손의 힘과 재료 위치에 따라서 썰었을 때 모양부터 매일 다르다. 그러니 익숙한 새로움이 무궁무진하다. 무얼 먹어야 할지 고민인 날은 그동안처럼 김밥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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