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빵 굽고 정자에서 아침 먹던 날
여름을 다시 만나는 중이다. 새벽녘에 지난밤 만들어 둔 빵 반죽이 자연스럽게 부풀어 오른 것을 확인하니 뿌듯하다. 동시에 새벽임에도 덥다 느낄 만큼 뜨거운 이 계절이 쓸모 있다고 여겼다. 여름은 빨리 지나가 버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한가득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하루가 어떻게 지날지 예상가능하다. 10시 무렵부터는 태양의 기세에 에어컨 켤 적당한 때를 고민하다 결국은 더위에 항복하듯 리모컨 전원을 누른다. 밥보다는 빵을 먹는 아침이 그리웠다. 온 세상 공기가 달걀프라이를 무리 없이 해낼 것처럼 달궈지는 때다. 저녁이 되어도 정도만 약해질 뿐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자기 전 빵 반죽을 했다. 밀가루가 얼마나 들어가는지 저울에 올리지도 않았다. 밀가루를 뜰 때 사용하는 작은 나무 주걱으로 네 번을 담았다. 한 번에 대략 50g 정도라는 건 사용할수록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여기에 만들어 놓은 지 좀 된 플레인 요구르트와 드라이 이스트, 소금 조금을 넣고 주걱으로 잘 저었다. 굳이 손을 빌리지 않아도 플라스틱 통에 담고 뚜껑을 닫아 놓으면 자연 발효가 되어 잘 부풀어 올랐다.
빵을 만들어야겠다는 마음 때문인지 다른 때보다 더 빨리 눈을 떴다. 예상했던 대로 굵은 거미줄을 만들 듯 반죽이 부풀어 올랐다. 전날 만들어 놓은 완두콩소를 티스푼으로 떠서 담았다. 시계가 5시를 목전에 둘 무렵, 앞 동 한두 집에 불빛이 새어 나올 뿐 모두가 잠든 새벽이었다.
빵 8개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빵을 오븐에서 구울 생각이었는데 직전에 마음이 바뀌었다. 오랜만에 찐빵을 만들기로 했다. 이건 찬바람이 부는 계절에만 어울릴 것 같지만 오히려 지금처럼 무더운 날과 어울리는 이 계절의 별미다. 구운 것보다 촉촉한 식감이 더위에 지친 마음을 빵이 축여주는 기분이다.
찜통을 꺼내어 준비하고 4개씩 두 번에 걸쳐 빵을 쪄냈다. 빵이 적당히 식어갈 무렵 남편이 일어났다. 종종 가는 원림 정자에 가서 아침을 맞이하기로 했다. 아이도 같이 가겠다고 했지만 6시 무렵에 집을 나서야 하니 전날 마음과 충분히 다를 수 있었다. 다시 자는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엄마랑 가려면 지금 나가야 해. 갈래?”
“응. 갈 거야.”
아이는 평소처럼 꾸물대는 일 없이 바로 일어나 간단히 세수만 하고 나온다. 빵을 다 만들고 나서 단호박과 옥수수 두 개도 쪘다. 스테인리스 통에 빵과 함께 그것을 넣고 복숭아도 하나 껍질을 벗겨서 먹기 좋은 크기로 담았다. 음료는 차가운 베지밀로 했다.
집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그곳으로 차를 몰고 갔다. 아마 우리가 제일 먼저 와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주차장에는 이미 두 세대의 차가 보인다. 십여 분을 걸어 올라가니 정자와 연못이 보인다. 이맘때쯤 피어나는 배롱나무꽃이 한창이다.
정자에 오르니 이미 두 팀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람들의 생각이 나와 남이 다르지 않음을 다시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어떤 이는 돗자리를 마루에 깔아 놓았다. 중년의 부부는 자리가 펴 있는 그곳이 자신들의 공간이라는 듯 벌렁 누워서 하늘이 예쁘다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눈다.
우리는 비어있는 어느 한 편에 앉았다. 아침에 일찍부터 서둘러서인지 허기가 몰려왔다. 갖고 간 음식들을 펼쳐놓았다. 빵은 통밀가루를 써서 그런지 쫀득하고 고소한 맛이 편안했다. 우리는 집에서 보다 더 천천히 먹으며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따라갔다.
바람에 나뭇가지가 살랑인다. 언덕배기에는 원추리 꽃이 피었다. 작은 오솔길 너머 보이는 저수지에는 연꽃이 봉오리를 맺고 있다. 나무가 만들어 준 그늘은 이른 아침임을 잊게 한다. 한낮이라고 해도 무리는 없겠다.
여름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흠뻑, 아니 생명을 위태롭게 할 만큼 내렸던 거센 비는 밭에서 목말라하던 이들에게는 큰 축복이었는지 정자에 오르던 길에 만난 작은 밭 깨는 꽃을 피웠다. 보라색 도라지 꽃에, 들깨꽃도 보인다. 여름을 외면하는 사이 세상에 나온 많은 것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여름이어서 좋은 것들을 만났다. 빵을 만드는 새벽녘의 고요는 겨울의 외로움과는 다르다. 어느새 밝아진 세상 때문에 재밌고, 그때에만 하루 중 가장 기분 좋은 편안한 기운이 난다. 정자에서 아침을 먹는 일은 추운 날이었으면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작은 계곡 물소리가 잔잔한 배경음악이 되어주고 앞에는 분홍색 배롱나무 꽃이 피었다. 정자 양쪽으로 나 있는 큰 정자 기둥이 액자처럼 다가왔다. 그 속에 담긴 자연은 누구도 쉽게 갖지 못하는 풍경의 주인이 된 듯했다.
숲 속 오래된 정원 입구에 있는 집 한 채, 주인 할머니의 압력밥솥 딸랑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문 앞에 매직으로 크게 써 놓은 옥수수라는 패널이 보이는 걸 보니 여름 한철 옥수수 가게를 열었나 보다. 가게 문을 열기 위해 일찍부터 옥수수를 삶는 소리가 쉼 없이 이어진다. 활짝 핀 꽃을 카메라에 담거나 구경하기 위해 찾는 이들 중에는 옥수수를 사가는 이들이 있을 것이고 할머니 호주머니도 조금은 두둑해질 것이다. 이렇게 여름에만 가능한 것들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