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망과 재봉틀 아줌마

오일장 풍경

by 오진미

“할망, 팥도 살 거?”

할머니가 두세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팥 그릇에 고개가 자연스레 향한다. 미뤄 짐작해도 아흔에 가까워 보이는 어르신이 콩, 좁쌀, 수수, 보리쌀 등 잡곡들에 눈을 떼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좁쌀에 멈췄다. 가게 주인은 단번에 알아차린다. 한 손에 적당량 좁쌀을 담고는 할머니 앞으로 가져간다. 어르신은 한 되를 사겠다고 했다. 옆에 있는 손녀로 보이는 이가 만원 몇 장을 지갑에서 꺼낸다. 조금전 내가 들은 팥을 살 거냐고 묻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끝난 줄 알았는데 할머니는 팥으로 걸음을 멈췄다. 팥알을 잠깐 만져본다. 옆에 있던 언니가 동지가 다가오니 팥죽 하려는 것 같다 했다.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아무 답을 하지 않았지만, 팥이 담긴 그릇에 시선을 한동안 묶어둔 건 그러겠다는 표현이었다. 다시 손녀의 지갑에서 돈이 나갔다. 계산을 끝내고 다부져 보이는 그가 할머니에게 가까이 다가가 돈을 얼마 썼는지 설명한다. 손녀의 검정 가방에 좁쌀과 팥이 들어갔다. 할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옆에는 머리를 하나로 질끈 맨 손녀가 발길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할망은 제주도 사투리로 할머니를 부르는 말이다. 언제 써봤는지 가물가물할 만큼 오랜만이었다. 단지 소리로만 다가오는 게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여러 정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몇 년 만에 서귀포 오일장에 갔던 날 귀가 뻥 뚫리는 듯한 따뜻한 풍경이었다.

오일장 잡곡가게

내가 커갈 때만 해도 사투리는 자연스러운 우리의 언어였다. 그 시절을 지나 지금 내게 다가온 ‘할망’은 뭉클한 감동이었다. 십 여분 정도 되는 짧은 순간 타인의 풍경을 감상했다. 할머니는 세상을 뭐라고 얘기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세월을 살아내었고, 손녀 역시 초등생 아이 몇은 둔 엄마 같았다. 서로가 같은 시대를 살아가지만, 서로가 겪는 무대는 분명히 다를 터다.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그동안 함께 비비고 살아온 삶의 향기가 가득했다.


동네 친구 부르듯 ‘할망’하고 부르는 목소리에는 내가 만들어 가고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편안함과 배려, 다정한 진심이 묻어났다. 시간을 내어 할머니와 오일장에 동행한 젊은 그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는 느린 걸음으로 콩이며, 팥이며 이것저것을 살피는 할머니에게 재촉하는 일 없이 기다렸다.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멈춰서 바라보았다. 몸에 익은 절기를 잊지 않고 동지팥죽을 계획하고, 몸을 생각해서 밥에 좁쌀을 섞어 먹는 어르신의 부지런한 일상도 보였다. 그들이 얼마나 함께 지내왔는지를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다시 장을 기웃거리다 동백꽃이 가득한 에코백이 놓여있는 가게 앞에 멈췄다. 함께 온 동생은 천으로 만들어진 작은 가방을 좋아한다. 난 별생각이 없었다. 동생이 한번 보자는 말에 가게로 들어섰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가방이었다. 소설책 두 권을 담고 동네 카페에 가면 좋을 귀여운 천 가방이었다.


가격을 물으니 오천 원이라고 했다. 바느질도 꼼꼼히 되어있고 안쪽은 초록 천이 덧대져 있어 양면 모두 사용 가능했다. 동생 얼굴에 꽃이 피기 시작했다. 내게도 하나를 고르라고 했다. 걸려 있는 것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 들었다. 그러자 다시 아이들 것도 챙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가방 네 개를 샀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신경조차 쓰지 않던 주인은 그제야 우리에게 눈을 돌린다.


재봉틀에 몸을 숙이고 있을 때는 그의 모습이 딱딱해 보였다. 그런데 우리가 가방 여러 개를 사서 그런지 순식간에 활기가 돌기 시작한다. 다른 것들도 이것저것 보여주기 시작한다. 직접 손으로 만드는 거라며, 어깨에 메어도 잘 흘러내리지 않아서 좋을 거라는 설명도 곁들인다. 자신이 만드는 것에 대한 자부심도 상당해 보였다.

그곳 물건들이 감촉 좋은 면이나 리넨 광목 등으로 되어 있어 보는 것도 만지는 것 모두 즐거웠다. 직접 하는 작업이니 수공비는 줄이고, 재료값에만 집중해서 물건에 가격을 매기는 듯했다. 겨울날 오후, 햇빛이 있지만 현대식으로 단장된 오일장 안 작은 가게는 조명이 없었다. 얼핏 보면 어두워서 우울한 분위기였다. 그냥 스쳐 지날 곳을 몇 걸음 더 옮겨 그 속으로 들어가니 다른 세상이었다.


자기 일에 자부심이 있는 소박하지만 알찬 가게였다. 거즈 천으로 만든 아이의 잠옷 바지도 샀다. 언니의 쿠션까지 더해지니 우리가 산 물건이 큰 비닐봉지 가득했다. 몇만 원 안 되는 돈으로 큰 행복을 산 듯했다. 가게를 찾는 이 별로 없어도 ‘드르륵드르륵’ 재봉틀을 친구 삼아 제 일을 하는 그의 성실함이 잔잔히 다가왔다. 오일장에서 다른 기분을 오랜만에 경험했다. 내 안으로 들어오는 이름 모를 이들을 향한 맑은 시선이었다. 그곳에는 하루를 살아가는 적극적인 에너지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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