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조선의 화폐권을 장악하다!!
읽기 전에 미리 핵심 개념 파악하기!!
1. 갑오개혁
2. 본위 화폐
3. 차관
4. 치외법권
5. 국채
식민지 수탈의 시작은 금융주권 상실에서 비롯된다. 금융-생산-판매 연결망에서 결정적 축인 금융주권의 부재는 국민경제 형성을 불가능하게 한다. 19세기 들어 서구 국가들은 외국 통화를 자국에서 몰아내고 단일통화를 만든다. 일본의 경우 메이지 유신 이후 지역별 은행들이 국가 통제 아래 은행권을 발행하여 국가가 화폐 발행권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단일 화폐 유통은 구성원들에게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기도 하였다. 화폐주권은 통화와 금융관리를 주관하고 여타 금융기관 감독권을 갖는 중앙은행을 통해 실현되었다.
그러나 개항 이후에 조선은 화폐주권이 잠식(蠶食)되다가 결국 완전히 빼앗기게 되었다. 개항장을 중심으로 멕시코 은화, 러시아의 루블 은화, 일본 화폐 등 외국 화폐들이 유통되자,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정권은 은본위제(銀本位制) 시행을 위해 '신식화폐발행장정'을 공포하여, 본위 화폐(本位貨幣)로 5냥 은화, 보조 화폐로 1냥 은화, 2전 5푼 백동화, 5푼 적동화, 1푼 황동화 등 5종의 화폐를 주조하고, 이미 통용되던 다른 화폐와 같이 사용하도록 규정했다. 일본은 1902년부터 사립 은행인 일본 제일은행을 통해 개항장에서 제일은행권을 유통시켰는데 결국 조선은 서서히 일본의 화폐가 장악하게 되었다.
결국 조선을 노리던 청나라와 러시아가 일본과의 전쟁에 패한 이후로 일본은 조선의 화폐-금융 주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04년 '한일 외국인 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에 의해 일본인 메카다 다네타로가 ㉠조선의 재정 고문으로 임명되면서 조선의 재정금융에 관한 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조선의 재정 고문이 된 매카다는 가장 먼저 '화폐개혁'을 단행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조선의 화폐 발행권을 박탈하고 일본 화폐를 신화폐로 바꾸었다.
'화폐정리'를 위해 '구(舊) 백동화 교환에 관한 건' (1905년 6월 24일)에 의해 구화폐의 교환이 시작되었다. ㉡조선인들이 신(新) 화폐를 사용하지 않자 일본 은행은 상국 상인들이 사용하는 엽전이나 백동화를 무담보 무이자로 빌려주고 신화폐로 상환(償還) 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이는데, 정작 조선 상인들은 상환시점에 이르러 시중에서 신화폐를 구할 수 없으니 은행에서 구화폐를 신화폐로 교환해야 했는데, 화폐가 많이 손상되었다거나 지금 신화폐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구화폐의 가치를 절반 이하로 평가하거나 받아주지 않는 방법을 썼다.
결국 이 과정에서 조선인들이 주로 사용하였던 구(舊) 백동화의 가치는 1/3 수준으로 떨어졌다. 결국 신화폐를 구하지 못해 ㉢파산하는 조선인 상인들이 늘어났다. 일본은 이러한 과정을 계기로 일본 제일은행권(신화폐)의 유통을 확산시켜, 이미 조선이 일본에게 완전히 지배되기 이전부터 일본 제일은행권이 전국적으로 유통되고 있었다.
│자료 1│ 화폐정리사업
│참고│ 화폐 개혁 조례
제1조 : 본위 화폐를 금으로 하고, 기왕 발행한 화폐는 신 화폐와 교환 혹은 환수할 것
제3조 : 구백동 화폐의 교환 및 환수는 광무 9년 7월 1일부터 개시할 것
제4조 : 구백동 화폐의 교환 만료 시한은 만 1년 이상으로 탁지부가 대신이 편리하게 정할 것
제5조 : 구백동 화폐의 교환 만료 이후에는 그 통용을 금지할 것
│참고│ 급작스런 화폐 개혁은 백성을 죽이려는 것
아무런 예고도 주지 않고 돌연히 이화 같은 발포를 하고 바로 실시함은 실로 배우지 못한 백성을 죽이는 것으로 어떤 근거도 찾을 수 없다. 특히 한국은 아직 문화의 정도가 유치하고 민간에 배부되는 소위 관보가 겨우 30부에 불과하고 신문지와 같은 것도 3천 정도 발행하는데 불과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포와 동시에 시행이라니 이 조치를 무엇이라 평할 것인가. 사실 그 비밀은 제정 이전에 벌써 일부에 누설되어 양화는 점차로 일부의 수중에 들어갔다. 한국민은 악화만을 손에 쥐고 알지도 못하며 단두대 상에 끌려온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실로 방안을 실시하는 대주의와 어긋나는 바이로다.
<경성상업회의소 의원이 일본 정부에 제출한 청원서>
│자료 2│ 화폐의 역사와 정치권력
화폐의 역사는 화폐가 정치권력에 의해 획득・계승・유지되었음을 보여준다. '화폐를 주조하는' 권력은 봉건 '귀족'으로부터 군주, 부르주아지 그리고 공화국 정부에까지 차례로 계승되어왔다. 오랜 세월 동안 통치자들은 화폐주조에 드는 비용을 대주었다. 특히 정치권력은 화폐를 통합의 도구로 이용했다. 프랑스 역사를 통해 우리는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프랑스는 영토 내에서 화폐가 유일한 지불수단으로 존재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정치적으로 통합되었고 진정한 경제 공간으로도 자리를 잡았다. 실제로 화폐가 상업적 거래를 순조롭게 발전시켰고, 더욱이 그것을 사용하는 공동체에서는 공통의 요소로 작용한다.
아느로 데자예, 2005년
여기서 잠깐!!
1. ㉠과 같은 정치 형태를 무엇이라 하는가?
2. ㉡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 까닭을 <자료 1>을 참고하여 그 원인을 적어보아라.
3.㉢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과정을 정리하여 적어보아라
4. 조선인들의 화폐정리 기간에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자료 1>에서 두 가지 이상 찾아 밑줄 쳐 보아라.
5. │자료 2│의 논지를 바탕으로 일본의 화폐정리사업의 목적을 설명해보아라.
일본은 한국 경제를 일본에 예속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한국 정부로 하여금 차관 도입을 강요하였다. 일본은 이 차관을 조선 내 경찰 기구의 확장 등 일제 침략을 위한 투자와 일본인 거류민을 위한 시설 확충에 사용하였다. 차관이 늘어나자 이를 갚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일본에게 더욱 경제적으로 예속되었다.
이에 일본에서 들여온 차관을 갚아 국권을 회복하자는 국채 보상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1907년 대구에서 서상돈 등이 조직한 국채 보상 기성회의 제의로 시작되어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등 각종 신문을 통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 운동에는 부녀자, 어린이, 기생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남자들은 담배를 끊고 부녀자들은 생활비를 절약하는 한편 귀금속을 팔아 성금을 모았다. 그러나 일본은 이 운동이 사람들에게 많은 부담을 주고 여러 가지 폐단이 있다고 방해하였으며 베델, 양기탁 등 중심인물을 성금 횡령의 누명을 씌워 구속하고 탄압하였다.
│자료 3│국채보상운동 취지문
지금 우리들은 정신을 새로이 하고 충의를 떨칠 때이니, 국채 1천3백만 원은 우리 한 제국의 존망에 직결된 것입니다. 이것을 갚으면 나라가 보존되고 이것을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나, 지금 국고에서는 도저히 갚을 능력이 없으며, 만일 나라에서 못 갚는다면 그때는 이미 3천 리 강토는 내 나라 내 민족의 소유가 못 될 것입니다. 국토가 한 번 없어진다면 다시는 찾을 길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찌 ㉣베트남 등의 나라와 같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일반 인민들은 의무라는 점에서 보더라도 이 국채를 모르겠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갚을 길이 있으니 수고롭지 않고 손해 보지 않고 재물 모으는 방법이 있습니다. 2천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금지하고, 그 대금으로 한 사람에게 매달 2 0전씩 둔다면 1천3백만 원을 모을 수 있습니다. 만일 그 액수가 다 차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응당 자원해서 일원·십원·백원·천원을 특별 출연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 대한매일신보, 1907년 2월 2일
│자료 4│영국인 베델
│참고│대한 매일신보의 울타리, 영국인 베델
1908년, 서울에서는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한 재판이 열렸다. 영국인 판사, 일본인 원고 미우라, 영국인 피고 베델, 한국인을 증인으로 한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 재판이었다.
베델은 1904년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런던 데일리 뉴스>의 특파원으로 내한하여, 그 해 7월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였다. 이 신문은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고, 고종의 친서를 게재하는 등 나라 안팎에서 일본의 침략 행위를 폭로하는 항일 언론 활동을 벌였다. 베델은 일제로부터 치외 법권 지대를 만들어 주는 울타리 역할을 하였고, 덕분에 박은식, 양기탁, 신채호 등의 편집인들이 소신껏 자신들의 주장을 펼 수 있었다.
이에 통감부는 눈엣가시였던 베델을 추방하기 위해 1 9 0 8년 5월 <대한매일신보>의 기사와 논설이 일본인을 배척하고 한국인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영국 상하이 고등 법원에 제소한 것이었다.
3일간의 재판에서 베델은 유죄 판결을 받고, 상하이에 호송되어 3주간 금고 생활을 하였다. 베델은 서울로 돌아온 뒤에도 항일 언론 활동을 계속하다가 1 9 0 9년 5월 1일 심장병으로 병사하여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참고│<대한매일신보가 가장 환영받았다
신문으로는〈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기타 여러 가지 신문이 있었으나, 제일 환영을 받기는 영국인 베델이 경영하는 <대한매일신보>였다. 당시 정부의 잘못과 시국 변동을 여지없이 폭로하였다. 관 쓴 노인도 사랑방에 앉아서 신문을 보면서 혀를 툭툭 차고 각 학교 학생들은 주먹을 치며 통론(痛論)하였다.
>> 유광열, 별건곤, 1929년 1월호
여기서 잠깐!!
1. 조선이 국채가 많아진 까닭은 무엇인가?
2. 베델에 대하여 세줄 이내로 설명해 보아라.
뭐야 이건!!
㉣에서 설명하는 베트남의 상황은?
더 생각해보기!!
국채보상운동의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해보아라. (IMF 시절 금 모으기 운동과 관련지어서 생각해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