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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학 Mar 04. 2016

2015년 해외 통합 기행

(2016년 1월 10박 11일 베트남팀)

우리를 비추는 거울 베트남

4번째 베트남행. 베트남은 늘 미안함과 고마움이 공존하는 나라이다. 처음 베트남을 갔을 때 어쩌면 그들이 한국인이 나를 우리가 일본인을 생각하는 것처럼 여길지 모른다는 다소의 두려움, 미국을 이겨낸 그래서 호전적이고 전투적 일지 모른다는 더 큰 두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따듯했고 한국인을 좋아했으며 나와 우리들을 환대로 맞이해주었다. 베트남에 대해 잘 모르고 그저 반성하고 사과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오히려 미국과 우리를 이해하고 과거는 잊고 미래의 평화를 추구하자는 그들에게 왜 대한민국을 용서하냐고 따져 묻는 무례함도 범했었다. 처음에는 베트남이라는 국가의 후진성, 교육의 열악함, 자본주의에 대한 굴복쯤으로 그들에 대해 무례한 평가를 했지만 이제는 그들이 미국과도 우리와도 평화를 이야기하고 함이 무엇인지 안다. 그리고 그들의 우리에 대한 그 따듯한 환대가 늘 그립다. 그래서 이렇게 또 4번째 베트남으로의 발걸음을 시작했다



1일차


아침 8시 50분 비행기를 타고 베트남에 11시 40분에 도착. 시차 때문에 2시간을 벌었다. 하루 26시간을 사는 날.
첫 점심을 먹고 호치민 묘가 있는 바딘광장과 호치민 박물관을 들렸다. 이번 우리의 일정에는 호이안과 후에가 있어서 다낭 직항 노선을 선택하는 것이 비용이나 이동면에서 효율적이지만 베트남에서 10여 일의 일정을 보내기 전에 호치민을 먼저 찾아가는 게 베트남에 대한 예의라 생각했다. 11시에 참배 마감이라 참배는 못했지만 바딘광장에서 호치민의 묘를 바라보고 잠깐의 묵념이라도 하는 것 그리고 호치민 박물관에 들려 호치민의 일생을 살펴보는 것으로 우리의 베트남 기행은 시작되었다.



베트남에서의 첫밤. 노상에 조그마한 탁자를 놓고 앉아 맥주를 한잔 마실 수 있는 베트남의 거리는 왠지 모르게 자유롭다는 느낌을 들게한다




2일차
탕룽대에서 하노이 사범대 한국인 유학생들과


하필 둘째 날이 월요일. 하노이에는 박물관이 참 많다. 규모나 화려함은 서울의 박물관들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나 내용과 구성에서는 베트남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월요일에는 모두 박물관이 휴무. 그냥 시내 관광을 하기에는 2일 차 일정으로 어울리지 않아 하노이 대학에서 하노이 학생들과 함께 거닐며 이야기를 니누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에 급하게 일정을 맞추어 보았으나 사회주의 국가 답게 허가의 절차가 까다로워 하노이 대학은 섭외가 되지 않았고 탕룽대라는 사립대학을 섭외. 그리고 베트남 한국어학과 현지인을 섭외하고 싶었으나 기말고사 기간인 이유로 한국인 유학생을 섭외했다. 대학 탐방은 별거 없었으나 한국인 유학생과의 대화는 매우 긍정적인 평가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날 오후에 하노이-다낭행 비행기를 타고 호이안으로 이동하였다.




3일차
다크투어리즘


전쟁·학살 등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나 엄청난 재난과 재해가 일어났던 곳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기 위하여 떠나는 여행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는 이번 베트남 통합 기행을 통해 베트남 전쟁에 담겨 있는 우리나라의 역사의 어두운 이면을 직시 반성하고 베트남과의 평화적 연대를 모색하고자 하였다

밀라이


선미공원

1968년 미군에 의해 400여 명의 베트남 학살이 일어난 곳이다. 베트콩 출몰지역이 아니었던 이 마을에 투입된 미군이 일상생활을 하던 베트남 민간인을 강간, 살해한 지역이다. 톰슨이라는 당시 현장에 있던 용기 있는 한 군인에 의해 알려졌으면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미국의 공식 재판을 통해 민간인 학살이 인정된 사건이다.
물론 수많은 군인 중에 한 명만이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며 그마저도 3년 반의 가택연금으로 끝나버렸으나 우리나라에 비하면...
<베트남 전쟁>의 저자 박태균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한국전쟁에서 노근리가 있었다면 베트남 전쟁에서는 밀라이가 있었다'라고 기술할 정도로 아픈 역사이다.









빈호아



베트남 전쟁에 대규모 전투부대를 한국 역시 수차례의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그 대표적인 마을이 빈 호아 학살이다. 약 420여 명을 이곳에서 학살을 했다.




학살된 인원과 우리는 한국군의 만행을 잊지 않겠다는 내용이 담겨진 비







지역별 학살인원 통계. 430명

이 마을은 66년에 한국군에 의해 학살이 자행한 이후 사람들이 공포심에 외지로 떠나 비어있다가 75년부터 다시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미


이곳 역시 68년 한국군에 의해 130여 명이 학살된 곳이다 






비석에는 당시 학살된 사람들의 이름과 출생년도가 기록되어있다. 68년 사건인데 68년생이 3명이다.






어느 기자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 '한국인의 추한 얼굴을 비추는...'이라는 표현을 했다. 도이모이 이후 베트남 정부는 미국과 한국 그리고 수십 년간 지배를 했던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에 힘을 쏟고 있다. 그리고 베트남인 역시 과거의 잘못 보다는 미래의 평화를 위해 힘쓰자고 한다. 특히 최근 케이팝 열풍으로 한국인들의 인기는 매우 높다. 하노이에 있는 대학들이 케이팝 경연대회를 할 정도로 우리 상상 이상으로 열광한다(어제 방문한 탕롱대에서 학교 안내를 할 때 우리 대학이 이 경연 대회에서 매년 1위를 한다고 자랑할 정도이다)
그러나 이건 베트남인들의 몫이고 결정인 것이다.
우리의 몫은 여전히 남아 있으며 우리는 무엇이 올바른 결정인가를 여전히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폴란드인이 이제 그만 사과해도 된다고 할 때까지 사과를 해야 한다는 세계 최강국 독일의 메르켈 총리의 말을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4일차


호이안에서 후에로 이동. 후에의 하이바쭝 고등학생들과의 교류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로...




후에의 조그마한 학교로 생각했는데 프랑스 식민지 시대부터의 전통을 자랑하는 큰 규모의 학교로 입학 성적과 대학 진학률로 보면 베트남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등학교라도 가이드로부터 전해 들었다. 





이우학교와 하이바쭝의 교류의 시작을 알리는 인사를 나누었다. 베트남 학생의 전통 아오자이가 참 아름다웠다.




중간 쉬는 시간에 전교생이 나와서 체조를 한다. 


이 시기에 아이들에게 해외여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경험은 낯선 환경에서의 같은 또래들을 만나 세상과 사람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거창하지는 않지만 음식도 나누어 먹고 축구도 함께 하며 그렇게 두 나라의 아이들은 하루를 보냈다.


5일차

오늘은 후에에서 베트남의 DMZ를 가는날 베트남 도로 사정상 3시간이 넘게 걸리기에 7시에 일정을 시작하였다



하이바쭝 학생들과 함께 DMZ로

통일된 베트남에 사는 학생과 그 통일의 과정에서 군사개입과 민간인 학살의 과오를 범했던 한국의 학생들이 함께 DMZ를 방문한다는 것은 꽤나 설레는 일이었다. 



케산

현지 가이드의 미숙함으로 케산 지역에 가서는 전승기념탑 같은데에서 사진 한 장 찌고 다시 한 시간을 되돌아오는 어이없는 일이 있었지만 케산 지역에 갔다는 것으로 우선 만족하자는 마음으로 그냥 넘어갔다.



점심을 먹은 동하마을 식당에 붙어있는 안내도. 벤하이 강을 끼고 상하 10km가 과거 분단 베트남의 DMZ 이다

케산에서 동하마을로 이동해 점심을 먹고 벤하이 강의 히엔르엉다리에 도착했다



하이바쭝-이우고 단체 사진


DMZ 박물관


분단시절 히엔르엉다리






히엔르엉 다리는 54년 제네바 협정 이후 분단 베트남의 상징이다. 우리나라의 38도와 DMZ처럼 베트남도 17도 선의 벤하이강을 끼고 남북 10km의 비무장 지대가 있었다. 미군의 개입으로 최대 격전지가 되었고 1600만 톤의 폭탄이 쏟아부어졌다고 한다. 20년이 지난 후 통일을 이룬 남북 베트남의 다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걸어가는데 참 수많은 미묘한 감정이 들면서 뭉클했다. 언젠가 나도 한반도의 군사분계선을 이렇게 여유롭게 걸어볼 수 있을까? 우리 아이들이 한국전쟁에 무감하듯 함께 간 하이바쭝 학생들 역시 무감한 듯하였다. 괜히 우리만 더 짠하다.


6일차




후에-다낭-하노이로 이동. 다시 하노이에서 마이쩌우로 이동. 아침 7시 반에 후에에서 출발하여 저녁 8시에 마이쩌우에 도착. 차가 들어가지 못해 한밤에 1km 정도를 그 무거운 짐을 들고 걸어 들어갔다



밤에 도착에서 아무것도 못 봤지만 우리의 숙소는 나름 괜찮았다.


7일차

마이쩌우에서 아침이 밝았다. 마이쩌우는 하노이 남서쪽으로 약 150km 정도 떨어진 54개 소수민족 중 타이족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우리는 마이쩌우 초입에서 30km를 더 들어왔다. 





아침에 일어나서 우리 숙소를 살펴보았다. 이런 곳이다. 어제는 어두워 하나도 보이지 않았던..
벌레와 해충이 많아 이렇게 이층 구조의 집을 짓고 산다고 한다. 과거에는 아래층에 돼지 등의 가축 사육을 해서 악취가 심했다고 하는데 이제는 그런 곳은 없다고 한다. 관광지화 되지 않은 베트남 소수민족의 거주 지역. 설렌다.




우리가 이곳에서 할 일은 수세식 화장실 짓기. 이 집은 농사를 짓는데 밭이 멀어 농사를 짓는 가장은 거의 집에 못 들어온다고 한다. 그런데도 일 년 소득이 우리나라 돈으로 50만 원 정도란다.
우리의 여행비의 일부에는 이 집의 화장실 건축비용이 포함되어 있다. 많지는 않다.
남자아이들은 땅을 파고 시멘트를 개고 여자 아이들은 벽돌과 모래를 날랐다.





화장실 하나를 짓는데 20명이 다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오전 일이 끝나고 여학생들은 할 일이 없었다. 마침 주말이라 여학생과 나와 유경아 선생님은 마을에 인사도 드리고 동네 꼬마들을 모아서 놀이 프로그램을 하고자 마을을 탐방하였다. 정말 상상 이상의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우리를 따라온 첫 3인방. 이 아이들이 우리의 프로그램 진행의 씨앗이 되었다


마을 한 바퀴를 돌고 3명의 마을 아이가 우리를 따라왔다. 나는 베트남 사람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친절한지 알고 있었지만 주저하던 아이들에게 힘이 되어주었던 정말 고마운 녀석들이다. 우리 아이들도 힘을 내고 본격적으로 마을에서의 프로그램을 시작하였다




세 명의 아이들과 숙소 근처의 아이들을 모아 놓고 비즈 공예를 시작으로 준비해간 여러 것들을 하기 시작했다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하던 우리들에게 집까지 초대해 차를 주셨다






동네 아이들이 아직은 부족한 듯하여 그리고 아직 베트남 사람들을 낯설어하는 듯하여 나름 베트남 베테랑이 내가 마을 인사 가자며 몇 녀석을 데리고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다시 마을을 돌아다녔다.
베트남 사람들의 친절함과 외부인에 대한 환대를 알기에 주저하는 아이들을 끌고 씬짜오를 외치며 사진을 찍어도 되는 제스처를 하며 허락을 받고 집안에도 들어가고 사진도 열심히 찍고 다녔다. 베트남 사람들은 사진을 남기는 것을 참 좋아하는데 사진 현상비 조차 부담되는 생활 형편이라 디카로 찍고 바로 보여주거나 폴라로이드로 현상해 주면 너무 좋아했다. 노부부가 단 둘이 사는 어느 집은 우리를 이층의 집안으로 불러 차를 내어주실 정도였다





어느새 자신감을 얻은 아이들은 구슬과 팔찌용 끈을 들고 다니며 동네에서 마주치는 아주머니들을 불러보아 팔찌를 만들기 시작했다. 예상외 대박이었다. 너무들 좋아하시면 지나가다 길거리에서 모여서 이렇게 필찌들 만들고 팔에 차시며 너무나도 즐거워하셨다.





여자 아이들이 마을 주민들과 이러는 사이 남자아이들은 벌써 이만큼
이렇게 마이쩌우에서 하루를 보내고 오늘 우리를 방문한 아이들에게 내일 아침 9시에 친구들을 데려오라고 하며 하루를 마쳤다.



하루 정리 모임 



마을 분들께 초대를 받아 감사하게도 함께 저녁과 술을 한잔 하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8일차




다음날 아침. 전날 세명의 효과는 엄청났다. 우리는 몰려든 아이들과 하루 종일 팔찌 만들기, 종이접기, 축구, 줄넘기, 얼음땡 등을 하며 지냈다.




남자아이들은 그새 벽체를 다 세우고 타일과 지붕 올리기는 전문가에 맡기고 화장실 건축을 끝냈다. 이제 우리 아이들은 콘크리트를 제조할 줄 알겠되었다. 이우학교에 새로운 건물도 지을 기세다.^^




루 일과가 끝나고 함께 화장실을 지었던 마을 분들도 다 이곳으로 모여 아이들과 함께 했다. 
우리에게 너무나 고마워했으며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을 너무 즐거워했으면 그만큼 우리도 너무 행복했다.




내일 떠난다는 말에 헤어지는데 30분이 걸렸다고 한다


이틀간의 짧은 인연이었지만 내일 떠난다는 우리의 이야기에 마을 아이들은 쉽게 집으로 발길을 돌리지 못했고 난 낮에 열심히 찍은 사진들을 현상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베트남에 가면 이렇게 사진을 찍고 그것을 나누어 주는 일에 열중하는 이유는 베트남 사람들은 사진을 좋아하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현상비가 부담스러워 사진이 거의 없으며(그래서인지 좀 사는 베트남 사람들은 집안 곳곳에 사진박물관인 양 자신과 가족들의 사진을 걸어 놓는다) 베트남 첫 방문 때 호이안 외곽지역 마을을 갔을 때 어르신들은 돌아가실 때 영정사진 조차 없다는 말을 들어서 이다. 그래서 이 마을에서는 어르신들은 얼굴 위주로 찍고 A4 크기로 크게 현상해서 드렸다. 늦은 밤 한 집 한 집 돌아다니며 사진을 전해드렸을 때 너무나도 고마워하시던 늦은 시간임에도 집에 들어와 차 한잔 하고 가라던 그 어르신들이 아직도 너무 고맙고 행복하다. 그렇게 잊지 못할 마이쩌우의 어느 마을에서의 이틀이 지났다.




9일차

정말 행복했던 이 마을에서의 추억을 뒤로 하고 우리는 7시에 이 마을 떠났다.





한 시간 즈음을 버스로 이동하고 우리는 마이쩌우의 어느 초등학교를 방문하였다.
예정대로라면 하루 종일 이 초등학교에서 교육봉사를 하는 것이었는데 오늘 시험일이란다.

아쉽지만 한 시간 반 정도 시간에 공연을 하고 종이접기 수업을 하고 축구를 함께하고 마쳤다. 수업 도중 우리 아이들에게 '언니'라고 하는 베트남 아이의 모습에 놀랐더니 옆에서 이 학교 선생님께서 한국어 수업을 하고 있다고 설명하신다.






그렇게 아쉬운 만남을 뒤로 하고 우리는 또 다른 기대를 가지고 마이쩌우의 다른 마을로 갔는데 이곳은 전형적인 관광지였다. 잘 정비된 숙소, 많은 상가들은 어제의 그곳보다 쾌적했으나 나뿐 아니라 많은 아이들이 어제의 그곳을 더욱 그리워하고 있었다.

오전 일과를 마치고 2시간 정도의 여유시간. 아이들은 기념품 상가를 돌아다니며 마이쩌우 전통 치마, 가방, 카펫 등을 사러 돌아다녔고 난 그 와중에 참 괜찮은 카페를 발견, 전형적인 베트남 커피를 한잔 마시는 여유를 느꼈다.




일정이 어긋나 오후 시간이 비었지만 가만히 있을 베트남 팀이 아닌지라^^ 가이드 분과 현지 주민의 도움으로 근처 어린이 집을 섭외(?)하였다. 그곳에서 우리가 준비한 모든 재료와 열정을 쏟아부으며 3~4세 아이들과 종이접기도 하고 팽이도 돌기도 손수건 그림 그리기도 하며 오후 한나절을 보냈다.






그 열정이 너무 과했는지 끝나자마자 몇 명은 병원행. 지금이야 웃으면서 말하지만 많이 걱정스러웠던 상황이었다. 그래도 다들 잘 버텨주어서 기특하고 감사하다.








병원에 간 아이들이 있어 다들 편한 마음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하루를 보람차게 보낸 후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숙소로 돌아가는 그 뿌듯함.




10일차


아이들의 증상은 예상보다 심각해서 저녁 10시가 넘어 들어왔고 또 한 명은 다시 새벽에 병원을 다녀오기도 하여서 아침은 계획과 상관없이 새벽에 병원에 다녀온 혜림이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모두들 다 동의하고 기다려주었고 예상보다 일찍 혜림이가 일어나 마지막 평반과 소감 나누기, 피드백 등을 한 시간 정도 하고 하노이로 떠났다.





하노이에서 마지막 베트남의 저녁을 보내며 우리는 하노이-인천행 23시 50분 비행기를 타고 9박 11일간의 베트남 기행을 마쳤다.





후기


'가이드 이상의 가이드' 하반만씨

우리의 가이드를 해주셨던 하반만씨. 베트남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고맙다며 화장실 건축 때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으며 새벽까지 병원을 왔다 갔다 하는 아이들을 끝까지 챙겨주셨다

71년생. 하노이에서 의대를 졸업했으나 인맥이 없어 취직을 못하고 우리나라에 산업연수생으로 들어와 2년 만기가 끝났으나 돈을 벌지 못해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취직. 다행히 좋은 한국기업을 만나 휴일에 한국사람들과 즐거운 추억을 가지고 열심히 일한 대가로 퇴직금까지 받고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귀국. 공무원과 결혼을 하고 하노이 대학 한국어학과 입학. 작년 졸업. 

우리나라로 치면 연고대 의대를 졸업하고 서울대 영문학과(하노이 대학 어문계열 입학 성적 순위는 한국어학과가 제일 높단다)를 나온 인재이다. 가이드로서 최고의 전문성을 가졌을 뿐 아니라 동족에 대한 따듯함을 가졌으며 한국인에 대한 깊은 호감과 감사함을 가지고 있는 분이었다. 술을 매우 좋아하며 그래서 짧은 기간 많이 친해질 수 있었다. ^^. 가이드를 넘어서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배움을 주셨던 분이다.

계속 이야기하고 싶을 정도로 즐거운 베트남이었다. 그래서 이만 마침.

마지막으로 13기 베트남팀 아이들아 너무 고맙고 즐거웠다.

https://youtu.be/wCFb7pxc9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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