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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학 Mar 03. 2016

마산 창동 예술촌

2016년 1월 사회혁신 소모임 

1기의 마지막 기행 



이우고등학교에는 이름이 없는 모임이 하나 있다. 나는 '사회혁신 소모임'이라고 하고 아이들은 '도시재생' 모임이라고도 하고 암튼 우리는 이름도 정하지 못한 모임을 한 학기 동안 했다. 동아리나 특기적성과 같은 모임이 아니라 시기와 아이들의 욕구에 따라 그 시기마다 필요한 공부모임이 발 빠르게 만들어지고 또 없었졌다고 다시 만들어지는 그런 모임이 더 필요하다 싶어 처음으로 시도한 모임이었다. 그 모임의 마지막 활동은 마산이었다.




무박의 기차여행

자 남쪽 지역 여행을 갈 때 자주 이용하는 건 수원역 마지막 기차다. 새벽 4시 즈음 남쪽의 어느 도시에 도착해 하루 종일 도시를 돌아보고 마지막 열차를 타고 다시 올라오는 그런 방법은 비용면이나 시간 이용면이나 그래도 일주일에 하루는 쉬어야 하는 직장인들에게 금토를 이용해 권장하고 싶은 방법이다




마산까지 가는 야간열차가 없어 23시 15분 순천행 기차를 타고 3시 45분에 순천을 도착. 아침을 먹고 6시 마산행 기차를 탔다. 하필 그날 마산-순천행 기차가 고장 나 중간에 멈추는 바람에 10시가 넘어서 마산에 도착했다. 15년 만에 추위라는 한반도의 한파 속에 우리는 새벽기차를 타고 마산에 도착했다.





마산 창동 예술마을


요새 도시재생 사업과 관련해 가장 핫한 곳이다.
마산은 조선 시대부터 남쪽의 최대 도시였다. 서해의 강경, 동해의 원산, 남해의 마산이라고 불리던 지역이다. 이 창동은 마산의 명동이라 불리며 마산의 중심지였던 곳이었으나 창원이라는 새로운 공업도시의 성장과 IMF의 직격탄을 맞고 소위 '깨진 유리창의 법칙'의 효과로 폐허와 도시범죄의 온상이 되었던 지역이었다. 그러던 지역이 청년 예술가와 주변의 시장과 함께 새로운 전기를 맞으며 도시재생 운동의 하나의 방문 코스로 각광받고 있다.





마진창을 아시나요?
방문객이 가장 많은 주말 10시가 넘은 시간인데 센터는 문이 잠겨있었다


다행히도 다른 센터는 문이 열려 관계자와 함께 이야기는 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제는 익숙하지만 고등학생들이 도시재생 관련 공부와 활동을 한다는 것에 생소해했다


창동의 사업 규모는 생각보다 컸다. 예술인 중심으로 운영되는 창동의 도시 재생 활동의 영역은 크게 3구역으로 나뉘어있으며 마산의 전통적 상권과 이 지역 출신의 문신이라는 걸출한 조각가와 관련된 지역 그리고 전통시장과의 연계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우리는 너무나도 열성적으로 안내를 해주는 지역 관계자의 설명을 듣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1. 사업 예산은??

- 국토부에서 600억을 지원해주었다. 
(헉! 600억)

2. 어떻게 이런 지방 소도시에 600억이나..? 
- 거의 폐허가 되다 시 피한 지역이다 보니 국토부에서 하는 도시재생 관련 사업에서 전주와 함께 지정되었다.

3. 600억은 어떻게?
- 대부분 지역 조사 및 사업계획 용역비로...
( 역시 실제 필요한 돈이 그 지역에 쓰이는 것보다 엄한 사람들이 가져가는 돈이 더 많다)
.
4. 조사 이후 사업은?

- 지자체에서 간판, 도로 정비, 센터 건립 , 주차장 설립 등의 비용을 지원하고 있다.( 주차장 확보 비용이 60억 인데 토지 수용 비용이 45억이란다. 땅주인들만 대박)

5. 센터는 관인가? 민인가? 

-관에서 발주하는 민간이다. 

6. 젊은 예술인들의 입주 유도 방법과 유지는?
- 과거에 번성했던 지역이라 건물주들이 돈이 많다. 지역이 쇠퇴한 이후 건물을 거의 버리다시피 했고 자신들은 다른 지역에 나가 살고 있기 때문에 지자체에서 제시한 임대비용을 받아 들였고 6:4의 비율로 지자체와 건물주가 임대료를 지원하고 있다. 어차피 임대 안 되는 건물이라 건물주들도 요구를 받아들였으면 2년 단위로 계약 및 지원을 해주고 있다

7. 지자체장이 안상수이던데, 그런 마인드가 없을 사람일 텐데...?

- 지자체 장이 한다기 보다는 해당 업무 부서가 하고 있다. 마산 진해 창원 통합시 마산 지원에 대한 약속이 있었다. 
(마산 진해 창원이 창원으로 통합)

8. 방문객이 가장 많은 주말인데 문 닫은 데가 많다? 
- 예술인들을 전국 단위로 모집하다 보니 주말에 집으로 쉬러 간다 (^^;)

결국 마산 진해 창원의 통합과정에서 창원으로 명칭을 통합하면서 마산에 약속했던 개발 자금이 이 사업으로 쏠린 듯하다.
가장 큰 걱정인 젠트리피케이션 효과는 관주도로 정말 잘 해결하고 있는 듯 하나(있다고 생각했는데 다녀온 이후 접한 어느 보고서에는 창동지역 임대료가 4~5배 올랐다고 한다) 아직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일어날 만큼 활성해 되지는 않은 듯하며 마산에 대한 지원 금액은 분명 한계가 있을 텐데 이 대로 머물면 실패한 사업이고 활성화되면 건물주들을 이겨낼 수 있을지...

마산 진해 창원이 통합되면서 창원이 시가 되었고 마산은 두 개의 구로 재편되었다. 창진 마라고 부르지 않고 마진 창으로 부르는 이유는 어감도 있겠지만 전통적으로 마산-진해-창원 순으로 번성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전근대 시절의 남쪽 최고의 도시 마산, 식민지 시대 이후 일본이 세운 근대 계획도시 진해 그리고 해방 이후 현대 공업도시 창원은 이렇게 명암을 달리하고 있다.




마산 창동의 먹거리


부림시장의 6.25 떡볶이는 어렸을 적 먹었던 아주 맛있는 국물 떡볶이의 전형적인 맛이었다. 어느 지역 소문난 맛집이라고 다녀본 곳 중에서도 (떡볶이가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겠냐만은) 손꼽히는 맛이다. 
또한 근처에 고려당이라는 58년도에 만들어진 빵집이 있다. 꽤 괜찮은 맛이다. 이 창동이 최고 번성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곳 고려당 앞에서 약속을 정했다고 한다. (나도 어렸을 적 강남에서 약속이 있으면 대부분 강남역 뉴욕제과 앞이었다)삐삐도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니 지금의 고려당은 맛도 맛이지만 추억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듯하다. 마산 답게 아구찜 골목도 있다.




마산을 누가 뺏어 갔는가?


3.15의거 발원지라고 표시된 상징물




마산 오동동 거리에 있는 3.15 부정선거 항쟁 발원지 표지다. 3.15 부정선거 이후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김주열의 사망 이후 더욱 거세진 이승만 정권에 대한 저항은 결국 4.19를 이루어내었다. 뿐만 아니라 해석과 의미부여에 따라 다르겠지만 박정희 죽음에 직접적인 역할을 했던 부마행쟁만 보다라도 마산은 민주화의 상징적 도시이나 이제는 그냥 그들의 경상도에 불과하다.



창동지역에서는 3.15 의거를 기념하여 315명의 시민이 참여하여 315개의 화분을 골목길에 전시하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었다


김대중에게 두려움을 느낀 박정희가 적극적으로 지역 갈등을 조작해 내며 선거에 활용한 이후 지역주의적 투표성향이 고착화된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4.19의 초석이 된 그리고 부마 항쟁의 그 마산이 이렇게 보수화된 것은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또 다른 과실인 듯하다. 그렇게 삼당 합당 이후  경남을 보수화 시킨 그 결과가 지금 현재의 정치 세력의 불균형을 고착화시킨 것이다. 불의에 저항하고 목숨을 내던지며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의 붕괴에 가장 중요한 사건들을 만들어 냈던 그때의 마산 시민들이 그립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도시 진해



마산 창동과 오동동을 둘러본 후 옆 동네 진해로 이동했다. 버스로 40분 정도 거리이다.
진해는 러일 전쟁(1902~5)에서 승리란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해군력 강화를 위해 해군기지를 만들며 세운 근대적 계획도시이다. 
강제 토지수용의 방식으로 중앙의 방사형 도로(지금의 중원로터리)를 중심으로 도시를 세웠다. 
지금도 우리의 해군사관학교가 있는 군사도시로서 이제는 폐선이 되어 열차가 끊겼지만 '삼천포로 빠진다'라는 말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다.





근대 계획도시였던 만큼 진해는 식민지 시대의 건물들이 많이 남아있다. 49년에 이승만과 장제스가 동아시아의 반공 진영 간의 연대를 위한 회담을 이곳 진해에서 했을 만큼 중요하고 번성했던 지역이었다.



중국국 포로가 정착해 49년부터 영업을.했다는 원해루. 이승만과 장제스가 들렀다는 풍문이 있는 오래된 곳이다.



추운 날씨 탓인지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거의 없었으며 심지어 원해루라는 꽤나 소문난 중국집 마저도 영업을 하지 않았다. 아마 벚꽃이 피는 군항제 시기를 제외하면 외부 관광객이 거의 없으며 내수마저도 풍요롭지 못해서가 아닌가 싶다.





벚꽃빵. 맛없다.

진해에도 47년부터 3대째 영업을 했다는 진해제과 오래된 빵집이 있다. 군산 이성당 마산 고려당 진해 진해제과처럼 과거에 번성했다가 지금은 지방의 소도시로 전락해버린 지역에는 오래된 빵집들이 있다. 



마산역. 날이.너무 추워 실내에서 기차가 들어오는지 확인 중

이렇게 무박 2일간의 마산과 진해의 일정을 마쳤다.




점차 기본적인 삶의 조건마저도 무너져 가는 시대. 그래서 이미 고등학생들에게 조차도 꿈과 희망보다는 공포와 생존의 담론이 더욱 치열하게 각인되는 시대에 다른 방식의 새로운 희망 아니 그저 최소한이라도 인간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다양한 삶을 살아내는 방법들을 찾아보고 아이들과 함께 희망을 가져보고 싶었다. 그래서 도시사회학을 공부하고 어설프지만 수업을 만들어보고 소모임을 만들었던 일 년의 과정이 마산 기행으로 일단락되었다.
어설프지만 함께 고민하고 함께 공부하고 그렇게 함께 해주었던 소모임 1기의 환주 가영 소라 해솔에게 감사하고 참 즐거웠다고 전하는 것으로 이렇게 일 년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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