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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May 10. 2016

상상의 도서관 놀이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정혜윤



인생에서 한 권의 책을 발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이런 제목의 책이라면 그 안에 답이 들어있을 듯하다. 이 책은 시사 다큐 전문 프로듀서이자 독서광인 정혜윤이 만난 독서가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책 관심자는 늘 다른 사람의 서가를 기웃거리게 마련이다. 저자는 소설가, 인문학자, 영화감독, 영화배우 등 다양한 분야의 책 탐독자를 인터뷰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각자 자신의 꿈을 세우는 과정에서 책이 잇는 길을 따라왔다.

이 책에서는 정혜윤이 만난 이들의 목록과 그녀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던 책들이 교집합으로 만난다. 필자는 진중권, 공지영, 은희경, 김탁환, 이진경 등 독서가 11인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책을 그녀 만의 방식으로 재배열했다. 한 권의 책 속에 담긴 무수한 책들의 세계로 안내한다.





한 권의 책을 발견한다는 것


우리 시대의 논객 진중권은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책의 미로를 발견했던 베를린 자유대학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개가식 도서관 안에 들어가서 헤매는 게 좋았어요. 한 책이 다른 책을 알려주고 그곳이야말로 미로였죠…… 도서관에 가서 놀아본 사람은 다 알 거예요. 아무 데나 가서 아무 페이지나 펼쳐보면 다른 책의 인용으로 이뤄진 게 책이란 걸 말이죠…… 상상의 도서관 놀이는 링크한다는 것입니다.”


진중권의 사고는 보르헤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 보르헤스는 유한한 시간의 초월을 꿈꾸던 작가이다. 그는 <바벨의 도서관>에서 ‘나는 한 권의 책, 아니 아마 책 목록에 대한 목록을 찾아 방황을 했다.’고 언급한다. 또 각각의 책은 각각의 독서를 통해 다시 태어난다고 했다. 소설가 김영하 역시 "백 명의 독자가 있다면 백 개의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그 백 개의 세계는 서로 완전히 다르다"는 말을 남겼다. 한 권의 책의 운명이 책이 쓰인 시점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어떤 의미 부여에 의해 정해진다는 뜻이다. 우리 역시 각자의 삶 속에서 책과 같은 운명을 되풀이한다. 이렇게 책을 읽는 일은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과 맞닿게 된다.  


진중권은 한 권의 책에서 받는 감동에 그치지 않고 맥락 속에서 자기 만의 새로운 의미를 만든다. 그에게 독창성이란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다시 자기 식으로 배치하는 것이다. 그는 이 상상의 도서관 놀이를 통해서 생각의 프레임을 얻었다고 말한다. 정혜윤 저자는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에서 발견되는 어마어마한 목차들이 우리를 여행하게 할 만큼 매혹적인 목차들, 그 속에서 길을 잃더라도 계속해서 파고들게 만드는 목차들이라고 감탄한다. 이렇듯 한 권의 책은 곧 세상의 모든 책으로 통하는 열쇠이다. 그리고 책의 미로에 함께 들어간 이는 어느 누구와도 다른 자신 만의 세계를 창조하게 된다.



한 권의 책은 더 나은 삶에 대한 열망


책은 세상에 나를 세우는 일 말고도 타인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베스트셀러 소설가 공지영은 남다른 개인사로 오랫동안 고통을 받아왔다. 작가는 안셀름 그륀 신부의 <너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말라> 책을 읽고 다시 살아갈 힘을 발견한다. 우리 모두는 늘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배심원석에 앉혀놓고 피고석에 앉아 우리의 행위를 변명하고자 하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 그녀를 불행의 멍에로부터 벗어나게 한 문장이다. 책의 힘으로 강인해진 그녀는 더 나은 삶의 꿈을 이루었다.


또 다른 애서가 김탁환, 그에게 소설가는 필연이었을까? 그는 100권짜리 <명주보월빙>, 180권짜리 <완월회맹연> 등 조선시대 대하소설을 읽고 역사 대하소설을 쓰는 작가가 되었다. 정혜윤 저자는 그에게 소설가가 된 이유를 물었다. 그는 지리멸렬한 현실보다 자신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역사 속 인물들에게 매력을 느꼈다고 말한다. 그는 <나 황진이>, <방각본 살인사건>, <리심>, <불멸의 이순신>, <열하광인> 외 정도전을 그린 조선왕조실록 시리즈 <혁명> 등을 썼다. 180권짜리 대하소설을 썼던 조선의 이름 없는 작가나 그것을 읽고 작가가 된 김탁환, 그들에게 책은 어떤 존재였을까? 아마도 그들은 그 안에서 자신과 닮은 영혼을 발견했을 지도 모르겠다. 



한 권의 책은 내면의 바다를 깨는 도끼


70-80년대 젊고 가난한 책 중독자들의 허기를 달래 준 문고본의 위력은 참 대단했다. 철학자 이진경 역시 삼중당 문고 책으로 소년기를 지냈다. 그는 카프카와 수학 문제 풀기를 좋아하던 특이한 학생이었다. 그는 예측 가능한 세계를 열망했는데, 수학은 계산된 세계를 보여주는 학문이었다. 그는 나중에 <수학의 몽상>이란 책을 썼다. 정혜윤 저자는 이진경의 수학 이야기에 자신이 읽었던 <스밀라의 눈에 관한 감각>과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추가했다. 책이 또 다른 책을 부르는 과정은 곧 한 세계가 다른 세계를 만나 혼합되고 새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진경이 최고로 꼽는 책은 <벽암록>이다. 그는 스스로를 내면이 없는 인간이라고 부른다. <벽암록>의 선문답을 통해서 비로소 자아의 허상을 발견했다고 한다. "한 권의 책은 내면의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는 카프카의 말처럼, 깨달음의 과정은 아집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자기를 쇄신해 가는 것이다. 그가 쓴 <노마디즘>역시 누군가에게 강력한 도끼가 될 만한 책이다. 정혜윤 저자의 웃지 못할 경험담이기도 한데, 제목 때문에 혹자는 여행자의 필독서 정도로 오해할 법하다. 이진경의 노마드(유목민)는 떠나는 자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새로운 것을 창안하고 창조하는 자, 타성에서 벗어나 전복을 꿈꾸는 자를 뜻한다. 책은 ‘나는 ~이다’가 아니라 ‘나는 ~되다’가 얼마나 새로운 세계인가를 말해주며, 제대로 다른 존재가 ‘되는(become)’ 방법을 알려준다.



상상의 도서관에서 발견한 책들 


- 파트릭 모디아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 친기즈 아이트마토프, <백 년보다 긴 하루>

-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나쓰메 소세키, <소가 되어 인간을 밀어라>, <길 위의 생>

-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황금가지>

- 산도르 마라이, <열정>

- 발터 벤야민, <베를린의 어린 시절> <아케이드 프로젝트>

- 애니 프루, <시핑 뉴스>

- 윌리엄 셰익스피어, <한여름밤의 꿈>

- 아쿠카타와 류노스케, <쓸쓸함보다 더 큰 힘이 어디 있으랴>

- 폴 오스터, <빵 굽는 타자기> <달의 궁전> 외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소로우의 일기>, <월든>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 외



책 속 밑줄 긋기


- 만약 새벽이나 한밤중에, 그리고 기쁠 때나 슬플 때 읽을 만한 좌우명 같은 것을 원한다면, 당신은 당신 집 벽에 햇빛 아래서는 금빛으로 빛나고, 달빛 아래선 은빛으로 빛나는 글자로 다음과 같이 써 두면 좋으리라.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타인에게도 일어나리라." <옥중기>


- 세상 사람들은 비가 오면 날씨가 나쁘다 하고 비가 그치면 날씨가 좋아졌다 한다. 계속 해만 쪼이면 가뭄이 든다 하고 비가 많이 오면 홍수다 하고 소란을 피운다. 그러나 우주는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우주의 본체에서 보면 소나기도 태풍도 홍수도 가뭄도 모두 자연현상일 뿐 거기에는 선도 악도 없다. 우주의 진리를 파악하고 있는 자에겐 날마다가 참 좋은 날이다. <벽암록> 중에서


- 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준비와 초대에 걸리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 <소로우의 일기> 중에서




사람과 책이 만나는 지점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한한 힌트를 준다. 책이란 다름 아닌 그 사람의 다른 표현이다. 결국 어떤 책을 사랑하느냐는 그 사람의 속성, 그 사람의 자존감, 그 사람의 희망, 그 사람이 꿈꾸는 미래, 그 사람이 살아온 삶, 그 사람의 포용력, 그 사람의 사랑을 드러내는 말이다. 저자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 이야기와 함께 ‘그 혹 그녀의 책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 이 목록은 못 말리는 독서가들의 인생에 중요한 획을 그은 책들이다. 이 상상의 도서관 속에서 어쩌면 내 삶의 길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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