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일>, 김연수
간혹 일이 잘 안 풀릴 때 소설을 읽는 습관이 있다. 책 속 인물들의 꿈과 좌절, 갈등과 반전이 교차되는 이야기에 한바탕 빠져들었다가 나오면 신기하게도 태산 같았던 장애물이 작아져 있다. 그것은 아마도 현실보다 더 실제 같은 허구의 삶으로부터 나도 모르게 위로와 용기를 얻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가는 대체 어떤 재능을 타고났을까? 이런 소설을 쓰기 위해 그들은 무슨 일을 할까?
소설가의 일
“제가 소설을 쓸 때, 가장 먼저 직면하게 되는 것이 제 자신의 경험이에요. 제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 세계관, 가치관들이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볼 때 방해가 돼요.” 김연수 작가는 소설가의 일은 자기를 벗어나 타인들을 이해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소설을 쓰는 일은 ‘인생이라는 게 원래 뭐 그 따위’라는 사실을 깊이 이해하는 일로부터 비롯된다.
김연수가 말하는 소설가가 되는 일은 예상 밖으로 단순하다. 그는 소설가가 되려면 먼저 글을 쓰라고 한다. “매일 글을 쓴다. 그리고 한순간 작가가 된다. 이 두 문장 사이에 신인, 즉 새로운 사람이 되는 비밀이 숨어있다.” 그는 처음 소설가로 탄생하는 순간을 이렇게 표현한다.
<소설가의 일>은 소설 창작에 관한 산문집이다. 이 책은 2012년 2월부터 1년간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에 연재된 글을 엮은 것이다. 작가는 이 글에서 생각하기와 말하기, 쓰기의 비밀을 소설보다 쉽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전한다. 그는 신년 계획과 소소한 만남, 자전거 도난에 얽힌 이야기 등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로부터 소설가의 작업을 끌어낸다. 책은 동기, 플롯과 캐릭터, 문장 등 소설을 구성하는 요소들에 대해 마치 선배가 후배에게 조곤조곤 일러 주듯 알기 쉽도록 설명한다.
김연수는 새해에는 다른 사람이 권하는 일은 무조건 해보겠다고 다짐한다. 그에게 해 보지 않은 일은 재미를 의미하는데, 이때 자신이 경험한 시간의 흐름을 소설로 보여줄 수 있다면 결과적으로 소설가의 일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창작의 비밀은 작가가 겪어낸 시간 안에 담겨있다. 우리의 삶 역시 자신의 경험치가 축적된 시간과 등가의 가치를 지닌다. 이렇게 한국 문학계의 중견 소설가가 밝히는 소설 작법은 인생사 우여곡절을 대하는 삶의 비밀과 맞닿아 있다.
창작에서 배우는 인생의 비밀
<소설가의 일>은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에서 작가 지망생에게 권하는 세 권의 책 중 하나이다. 유시민 작가는 그의 저서에서 이태준의 <문장강화>, 김형수의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와 함께 김연수의 책을 추천했다. 시나 소설을 쓰지 않더라도 글쓰기에 대한 인식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에서 김형수(문학평론가, 시인)는 ‘인간의 사유가 언어를 매개로 해서 발달하고, 문자를 갖지 못하면 자기의 사유와 자기 고민을 깊이 있게 체계화시킬 수 없다’고 말한다. 일상의 삶에서도 누구나 글쓰기가 필요한 까닭이다.
이 책은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기까지 고려해야 할 요소들을 차례로 다루고 있다. 1부에서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전제인 열정, 동기, 핍진성을 논한다. 2부는 소설의 구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캐릭터와 디테일을 채우고 플롯을 짜고 내용을 전개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3부는 문장과 시점에 대한 실질적인 창작 매뉴얼을 안내한다. 김연수는 글쓰기에 대한 기본원칙으로 <북회귀선>의 헨리 밀러가 창안한 11 계명을 거론하는데, 소설이 재능보다 부단한 자기 절제의 생활방식으로 가능함을 알려준다. ‘한 번에 하나씩 일해서 끝까지 쓰라’ ‘짐수레 말이 되지 말라! 일할 때는 오직 즐거움만이 느껴져야 한다’ 등 대문호의 조언은 소설을 넘어서 가치 있는 삶을 위해서도 새겨야 할 점이다.
사는 동안 우리가 어떤 일에 몰두하느냐 에 따라 세계를 해석하는 우리의 방식이 새롭게 결정되는데, 생각이 바뀌면 행동도 달라진다. 소설은 이를 보여주기 위해서 대사와 행동, 표정, 몸짓으로 표현해야 하는데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작가는 생각만 바뀌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이처럼 변화를 원한다면 작품 속 캐릭터처럼 우리의 말과 행동과 표정과 몸짓도 바뀌어야 한다. 소설에서 좌절은 평범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만드는 스토리텔링의 아주 중요한 도구이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모든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다’라는 니체의 말처럼 실생활에서 겪는 시련 역시 한 인간이 성장하는 데 중요한 거름 임을 잊지 말자.
모든 위대한 소설가들은 자신이 쓸 수 없는 것을, 몰랐던 것을 쓴 사람들이라고 한다. 사는 일이 경험을 통해 몰랐다가 알게 되는 과정이듯이, 글쓰기 역시 ‘모른다’에서 안다’로 이어지는 과정이다. 어떻게 하면 쓸 수 없는 것을 쓸 수 있을까? 작가는 쓸 수 없는 것을 쓰기 위해서는 쓸 수 있는 걸 정확하게 쓰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충고한다.
느리게, 멀리까지, 오래 달리는 글쓰기
흔히 인생을 긴 마라톤에 비유한다. 마라톤에는 인간승리식의 PTA 달리기(Pain, Torture, Agony)에 맞서는 LSD 달리기(Slow, Long, Distance) 법이 있다고 한다. 김연수 소설가는 오직 즐거움을 위해 천천히 달리는 방식처럼 전지적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매일 ‘느리게’ 글쓰기를 강조한다. 이 말 뜻에는 나만이 바라본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을 파악하는 일련의 느린 시간이 포함된다. 작가는 매일 조금씩 타인을 이해하려고 시도한다면 우리의 영혼에 새로운 문장을 쓸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책 속 밑줄 긋기
현대소설의 윤리는 불안을 이겨내고 타자와 공존하는 그 용기에 있는 셈이다…… 용기는 동사와 결합할 때만 유효하다. 제아무리 사소하다고 해도 어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건 용기가 될 수 없다…… 이 삶이 멋진 이야기가 되려면 우리는 무기력에 젖은 세상에 맞서 그렇지 않다고 말해야만 한다. 단순히 다른 삶을 꿈꾸는 욕망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떤 행동을 해야만 한다. 불안을 떠안고 타자를 견디고 실패를 감수해야만 한다. – ‘욕망에서 동기로: 가장 사랑하는 것이 가장 힘들게 한다’ 중에서
말이란 늘 캐릭터의 욕망을 배반하는 원치 않은 부산물이다. 그건 소설에서뿐만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대화를 나눌 때 자주 서로를 오해하는데, 그건 대화를 통해 우리가 진짜 욕망이 아니라 가짜 욕망을 서로 교환하기 때문이다…… 진짜 원하는 바가 뭔지 알고 싶다면 ‘표정, 몸짓, 행동’을 관찰해야 한다.
– ‘욕망에서 동기로: 가장 사랑하는 것이 가장 힘들게 한다’ 중에서
“흔한 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건 너무나 특별한 일이었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래서 일상의 시간이 감사의 시간으로 느껴진다면, 그래서 그 일들을 문장으로 적기 시작한다면 그게 바로 소설의 미문이자, 사랑에 빠진 사람의 문장이 된다. – ‘문장, 사랑하지 않으면 뻔해지고 뻔해지면 추잡해지는 것’ 중에서
……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 ‘그럼에도 계속 소설을 써야만 하는 이유’ 중에서
자기에게 없는 것을 원하고 투쟁할 때 이야기가 발생한다. 더 많고 대단한 걸 원할수록 더 엄청난 방해물을 만나고, 소설 주인공의 생고생(이야기)은 더욱더 다채로워질 것이다. 우리의 삶 또한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한 편의 긴 소설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새로운 내용을 채울 수 있을까? 우리의 영혼에 쓰일 문장은 결국 자기에게 달려 있다. 김연수 작가는 인간은 누구나 최대한의 자신을 꿈꿔야 한다고 말한다. 최대한의 내가 되는 일. 느리게, 멀리, 오래 달리는 마라토너의 마음으로 다시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