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알아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다.
"너 말하는 도중에 가끔 푸- 소리 내는 거, 그거 프랑스 사람들의 습관을 닮았어."
내가 대화 중에 푸- 소리를 낸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 이후로 나는 나의 '푸-'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나는 정말 푸- 소리를 자주 냈다. 뭔갈 한심하다고 생각하거나 잘 모르겠을 때, 쑥스러운 순간, 할 말을 고르는 중에, 체념의 의미로, 기타 등등. 걸핏하면 푸- 였다.
이처럼 나는 나에 관한 많은 것들을 타인을 통해 배워간다. 그들이 던저주는 다양한 형태의 단서 - 직접적인 말이나 표정, 혹은 어떤 감정의 계기가 되는 상황이나 사건 같은 - 를 손에 쥐고 나를 고민한다. 그 단서들을 좇아가다 보면 몰랐던 내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푸- 습관처럼), 처음에는 상대의 오해라고 착각했던 면이 사실은 진짜 내 모습임을 인정하게 되기도 한다.
어떤 오해는 음침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훗, 내 연출에 속아 넘어갔군.' 하면서, 내가 되기를 바라는 나의 모습으로 나를 계속해서 죽 오해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 오해가 풀릴까 봐 전전긍긍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내가 바라던 나의 모습에 더 가까워지는 일도 생긴다. 나를 좋게 봐주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은 피드백을 많이 들을수록 나는 더 괜찮은 사람이 된다.
때로는 지독한 몰이해에 억울할 일도 생긴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나를 배운다. 억울함은 나의 결핍이나 욕구와 연결되게 마련이니까.
타인의 존재가 나를 더 또렷하게 만든다는 사실이 재밌다. 김춘수 시인의 시구처럼,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꽃이든 뭐든 될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생각하자면 나 또한 누군가를 또렷하게 만들고 있다는 말이다. 이 놀라운 사실에 갑작스러운 책임감을 느낀다. 웬만하면 상대의 아름다우면서도 강인한 면을 선명하게 만드는데 협조하고 싶다. 그런 시선과 말그릇을 갖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가끔은 나에 대해 가장 모르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내가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나도 모르게 반복하는 습관 같은 것들은 미처 눈치채지 못해서 모르고, 본질적인 '나'에 대해서라면 그동안 쌓여온 데이터가 너무 많아서 과부하가 온다. 그 데이터들은 또 얼마나 일관성이 없는지. 분석이 어렵다. 모순투성이. 이것이 나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도 유일한 표현이다.
내가 진정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느낌. 과거에는 이 느낌을 다소 겸손한 태도로 여겼다면, 지금은 조금 무책임한 것 아닌가, 생각한다. 충분히 성찰하지 않고 산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만 같아서다. 성인이 되면 나 자신을 좀 더 분명하게 알게 될 줄 알았는데. 지금 나를 돌아보자면 그저 알아만 가다 죽음을 맞을 것 같다.
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