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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레사 Jan 02. 2022

싱가포르에서의 연말연시

싱가포르에 입성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무탈하게 지냈지만 나는 문득 자주 우울해진다. 연말을 친정에서 보내고 올 걸. 크리스마스를 크리스마스답게, 새해를 새해답게 맞이 할 수 있었다면 내 마음이 좀 더 나았을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여유가 사치가 되는 코로나 시대. 시시각각 여닫히는 국경의 문 앞에서 등 떠밀리는 시대다. 그런 무력함을 가리기 위해 크리스마스이브에 비행기를 타는 것이 꽤나 상징적이지 않느냐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당연히 별거 없었다. 아니 사실 생애 최악의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성탄 이브 만찬은 배달시킨 만두로 대신해야 했고, 무슨 이유에선지 결제가 되지 않던 카드 때문에 오랜 시간 배달 어플 속에 갇혀 열을 냈다. 아이들 모르게 바리바리 싸온 선물들은 아이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산타에게 적어 보낸, 바로 그 장난감이 아니라는 이유로.

크리스마스 선물

좋아하는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해 추운 연말을 따뜻하게 보내곤 했던 내게 이곳 날씨는 너무 덥거나 비가 너무 많이 내렸다. 사실 날씨는 핑계고 초대할만한 사람들이 없었다. 없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없다. 그렇다면 떡국을 끓여 연시 기분이라도 내보자며 찾아간 쇼핑몰에서 한국 마트를 찾다 길을 잃었고, 결국 빈손으로 돌아왔다.

쓰레기통으로 가버린 떡국

 내일이 당장 새 해인데. 이렇게 멍청한 일이 다 있나. 그렇게 나의 2022년 1월 1일 첫 스케줄은 마트에 가는 것이 되었다. 어제 일을 애써 웃어넘기고 다시 찾아간 한국 마트에서 마침내 떡을 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떡은 상해있었다. 그걸 떡국을 다 끓여놓고, 정성스레 그릇에 담아놓고 나서야 알았다. 떡을 버리면서, 처참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뭐라고. 떡이 뭐라고. 이곳에 온 이후로 무엇하나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다. 엉망진창이다. 싱가포르는 나를 반기지 않는다. 쓰레기통에 담긴 쉬어버린 하얀 떡은 보랏빛 도라지 꽃이다. 소설 <소나기>에 나오는 복선. 어두운 싱가포르 생활을 암시하는 복선.


상황 파악을 하자마자 밖으로 달려 나간 남편은 어느새 손에 떡을 쥐고 돌아왔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한국 마트가 있었다고 말하는 그의 품에 안겨 목놓아 울었다. 떡 때문에. 떡을 용케 구해 온 남편 때문에. 길을 잃지 않고, 상하지 않은 떡을 들고 온 게 고마워서.


다시 육수물을 올리고 떡 봉지를 가위로 자르는데 까만 가루가 우수수 떨어졌다. 재수가 없으려니 습기제거제를 다 자른다. 욕지거리를 하며 그것들을 치우고 씻어냈다. 겨우 다시 만들어낸 떡국을 온 가족이 맛있게 먹었다. 우리는 그렇게 새 해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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